등록 : 2010.04.15 08:28
수정 : 2010.04.15 08:28
[매거진 esc]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우리가 동화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것이 언제 일이었더라. 회사에서 보는 침울한 타인의 얼굴이 거울 속 내 얼굴과 꼭 같음을 언제 깨달았더라.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면 종종 놀라게 되는 한 가지. 언젠가 우리는 모두 동화책 저편의 아이였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모든 내용을 단 한 단어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비관적인 어른이 아니라, 날마다 반복되는 세상을 지칠 줄 모르는 놀라움으로 소화해내던.
앤절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은 머리 굵은 독자를 그때 그 세계로 끌고 돌아간다. 예컨대 표제작 <피로 물든 방>. 동화 <푸른 수염>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에서 어린 아내는 여러 번 아내를 맞았던 남편에게서 단호한 주의사항을 전달받는다. 특정한 방, 그 방에만큼은 들어가지 말 것. 앤절라 카터는 동화가 능숙하게 숨겨둔 장면들을 성인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남편이 금지한 방문을 열어젖힌다. 그 안에 든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차라리 열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한다. 어린 아내는 방에 들어갔던 흔적을 모두 지워낸 다음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다. “(나는) 그의 악보를 뒤져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찾아냈다. 나는 치유를 위해 바흐의 평균율 곡을 모조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다 친다면 아침에 나는 다시 처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두 가지를 묶어 스스로를 위안한다. 바흐의 피아노곡을 실수 없이 치는 것과 처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하지만 그 외에 기댈 것이 어디 있던가.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고,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기댈 곳 없는 어른들이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서 벗어날 작은 희망이라도 부여잡는 일은 그래서 희극적이다.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비논리의 논리를 맹신하는 일. 그래서 오늘도 푸른 지붕에 사는 장로님은 천국에의 꿈을 꾸는 것이다.
이다혜/<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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