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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0 20:24 수정 : 2010.01.22 15:34

허화자 할머니가 손으로 빚은 홍주. 한 번에 겨우 7~8병의 술만을 내린다. 강제윤 제공

[매거진 esc]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전남 진도 읍내시장에서 만난 홍주 빚는 허화자 할머니

저물녘 전남 진도읍내 시장, 어느 골목쯤이었을까. 문득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과 맞닥뜨렸다. 진열장이 텅 빈 낡은 담배가게. 반쯤 열린 격자문 안, 희미한 백열등 불빛 아래 할머니 한 분이 바닥에 주저앉아 저녁을 들고 있다. 그 쓸쓸한 생의 풍경에 나그네는 무너져버렸다. 무엇엔가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도는 홍주의 고장. 홍주를 만드는 분이 아닐까? “할머니, 혹시 여기서 홍주 빚으세요?”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을 가리킨다. 가게 앞에 입간판이 서 있다. 진도홍주 국가예능보유자의 집.

나이 팔십, 손수 술을 빚어 온 세월만 오십년. 할머니는 처음 본 객에게 밥상을 차려주지 못하시는 것이 미안하다. “밥은 자셨소. 못 자셨지. 내가 허리가 안 아프면 김치하고 국하고 밥을 차려줄 텐디. 허리가 아파 내 밥도 잘 못 해먹어요. 미안하요.”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결혼을 했고 집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청상 아닌 청상이 되어 홀로 아이들을 길렀다. 얹혀살던 숙모에게 홍주 빚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명인의 술도가는 궁색하다. 그이가 사는 집이 그대로 술을 빚는 작업장. 50년 세월을 부엌에서 장작불을 때 술을 내렸다. 할머니는 술 내리는 날은 아무것도 안 드신다. 혀에 다른 맛이 배어 술맛을 모르게 될까 봐서다. 화장한 여자들은 술 내리는 고소리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화장품 냄새가 스며들까 봐서다.

1984년쯤이었다. 간경화를 앓던 판화가 오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할머니의 조카와 같은 학교 친구인 오윤은 젊은 시절부터 진도를 드나들며 홍주를 마셨더랬다. “오윤이가 다 죽게 돼서 다시 진도로 왔어. 내가 운림산방 근처에 방을 얻어 줬지.” 오윤은 숯덩이처럼 까만 얼굴로 매일 그 독한 홍주를 마셔댔다. 징하고 독한 술만 마셔대니 얼굴은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죽음을 재촉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윤이 여자를 데려왔다. 그 여자와 또 홍주를 마셨다. 그렇게 사오일쯤 지났을까, 시커멓던 얼굴이 붉어지며 화색이 돌았다. 할머니는 오윤의 얼굴빛을 찾아준 것이 홍주였는지 그 여자였는지 지금껏 알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홍주와 사랑의 합작품은 아니었을는지. 그 뒤 오윤은 판화 한 점을 보내왔다. 할머니를 모델로 한 작품, ‘진도 고모’. 가을 어느 비 오는 날, 술을 빚어야 하는데 날은 춥고, 어찌해야 할까 걱정스럽게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어서 밥 먹으러 가씨오. 여는 일찍들 문을 닫아.” 나그네는 밥보다도 홍주가 더 간절하다. 귀한 술을 파시라 하기가 미안해 조심스레 말을 꺼내니 돌아오는 대답이 단호하다. “안 돼. 밤에 술 먹으면 못써. 아침에 와. 밤에 독한 술 먹으면 무조건 죽어. 술에 맞아 죽든가. 술 먹고 싸우다 맞아 죽든가. 아깐 술 함부로 낭비하면 쓰능가.” 칼날 같은 말씀이 살 속을 파고든다. 아프다. 칼끝이 심장을 찌른다. “술로 아깐 세월 탕진 말어. 청춘 금방 가버려. 애기들도 늙구만.”


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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