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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31 20:12 수정 : 2010.04.02 10:25

배들도 지치면 포구로 돌아와 쉰다. 완도의 한 포구에서 쉬고 있는 고깃배들. 강제윤 제공

[매거진 esc]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보길도에서 만난 티켓다방 아가씨를 다시 완도에서…

폭풍이 온다고 했다. 여객선은 모두 발이 묶였다. 완도 읍내 거리를 배회하다 어떤 다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 있던 여종업원이 문을 열고 나와 주문을 받는다. 여자는 말 한마디 없이 메뉴판을 놓고 돌아선다. 천오백원짜리 차 한잔 마시는 뜨내기가 마냥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다방에서 반기는 것은 티켓 손님이다. 낮에 오는 차 손님이 살가운 것도 밤에 시간당 몇 만원짜리 티켓을 끊어주기 때문이다.

여자는 양은 쟁반에 티백 녹차 한잔을 담아 온다. 그런데 찻잔을 내려놓는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저 혹시….” “왜요.” 여자가 얼굴을 들어 나그네를 정면으로 주시한다. “저 모르시겠어요. 보길도에 계셨었죠.” “어머나, 선생님….” 여자도 기억이 난 것이다. “여기 있었군요.”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떨군다.

나그네가 보길도에 살 무렵, 다방에서 일하던 여자는 티켓을 끊어준 마을 사내와 함께 나그네의 집을 찾았다. 그날 여자는 앞으로 다방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여자는 부산 사람이었다. 사업을 하는 남편과 두 아이와 부유하게 살았더랬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여자는 남편 몰래 친구에게 몇 억원의 돈을 빌려 주었다가 떼였다. 여자는 돈 한푼 못 받고 내쫓김을 당했다. 사십 넘어 처음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여자는 2년 동안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단골손님으로 오던 택시 기사와 눈이 맞았다. 10년 연하의 남자는 여자를 끔찍이도 위해 주었다. 둘은 곧 살림을 차렸다. 남자가 음악을 좋아한다기에 식당 일로 어렵게 모은 돈 천만원을 털어 남자의 택시에 고급 오디오를 달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남자가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래도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남자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이것 사 내라, 저것 사 내라” 요구하며 구타를 했다. 술이 깨면 남자는 잘못했다고 엉엉 울며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여자는 결국 남자로부터 도망 나와 다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섬으로 흘러들었다. 남자는 섬까지 쫓아와 행패를 부리고 갔다. 그날도 남자는 택시에 내비게이션 설치할 돈을 부쳐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여자는 어찌할지 고민이라며 울먹였다.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 거절하기 어렵다고 했다. 전화 속에서 여자에게 쌍욕을 해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까지 들렸다.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어찌하면 좋겠냐고 여자는 울먹였다. 나그네는 말했다. “그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거다. 섬으로까지 팔려온 가엾은 여자에게 돈까지 뜯어내는 파렴치한이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도 돈을 보내라는 남자의 독촉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는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핸드폰을 꺼버리세요.” 여자는 배터리를 뺐다. 여자는 “추석이 지나면 계약이 끝나니까 부산으로 돌아가 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여자를 다시 완도에서 만났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나그네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마 여자는 그 택시 기사와도 끝내 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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