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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심청각 앞의 심청 조형물. 강제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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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백령도 심청각에 전시된 효행전설을 읽으며
백령도 진촌리 북쪽 산 중턱 심청각에 오른다. 백령도는 황해도 해주와 함께 심청전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 바다에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물살이 센 곳으로 악명 높았다. 또 백령도에는 심청이 연꽃을 타고 떠내려왔다는 연화리 마을도 있다. 설화가 현실의 무대를 빌려 생명을 얻은 것일까. 심청각 앞에는 “효를 관광상품화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효 의식을 고취하려는 뜻에서 인당수와 연봉 바위가 보이는 이곳에 심청각을 건립하였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런데 나는 문득 한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심청은 정말 효녀일까? 그녀는 눈먼 아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팔았다. 아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딸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정말 효도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효도라면 참으로 끔찍한 효도가 아닌가. 봉건 왕조시대에는 심청처럼 자식이 아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칭찬받았다. 아비인 왕을 위해 자식인 백성들이 언제든지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효는 충을 강요하기 위한 억압의 기제로 이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 시대 사람들이 심청전에 열광했던 것은 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보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청이 인신매매되어 목숨을 잃는 것은 현실이지만, 용궁으로 가고 연꽃에 모셔져 송나라 황후가 되는 보상은 판타지다. 판타지의 보상을 미끼로 현실의 목숨을 요구하는 행위는 분명 사악한 짓이다. 심청은 왕조사회 충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심청의 효행은 안타까움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본받아야 할 덕목은 아니다. 그런데도 심청각까지 지어 심청의 효도를 칭송하고 미화하는 것은 목숨 경시를 조장하는 행위다. 진정한 효도란 부모도 자식도 함께 사는 일이지, 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부모만 사는 일은 아니다. 심청각에는 심청 이야기만이 아니라 또다른 잔혹한 효행 이야기들도 교육용으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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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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