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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16 10:53 수정 : 2010.09.16 10:53

백령도 심청각 앞의 심청 조형물. 강제윤 제공

[매거진 esc]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백령도 심청각에 전시된 효행전설을 읽으며

백령도 진촌리 북쪽 산 중턱 심청각에 오른다. 백령도는 황해도 해주와 함께 심청전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 바다에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물살이 센 곳으로 악명 높았다. 또 백령도에는 심청이 연꽃을 타고 떠내려왔다는 연화리 마을도 있다. 설화가 현실의 무대를 빌려 생명을 얻은 것일까. 심청각 앞에는 “효를 관광상품화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효 의식을 고취하려는 뜻에서 인당수와 연봉 바위가 보이는 이곳에 심청각을 건립하였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런데 나는 문득 한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심청은 정말 효녀일까? 그녀는 눈먼 아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팔았다. 아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딸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정말 효도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효도라면 참으로 끔찍한 효도가 아닌가. 봉건 왕조시대에는 심청처럼 자식이 아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칭찬받았다. 아비인 왕을 위해 자식인 백성들이 언제든지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효는 충을 강요하기 위한 억압의 기제로 이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 시대 사람들이 심청전에 열광했던 것은 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보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청이 인신매매되어 목숨을 잃는 것은 현실이지만, 용궁으로 가고 연꽃에 모셔져 송나라 황후가 되는 보상은 판타지다. 판타지의 보상을 미끼로 현실의 목숨을 요구하는 행위는 분명 사악한 짓이다. 심청은 왕조사회 충효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심청의 효행은 안타까움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본받아야 할 덕목은 아니다. 그런데도 심청각까지 지어 심청의 효도를 칭송하고 미화하는 것은 목숨 경시를 조장하는 행위다. 진정한 효도란 부모도 자식도 함께 사는 일이지, 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부모만 사는 일은 아니다. 심청각에는 심청 이야기만이 아니라 또다른 잔혹한 효행 이야기들도 교육용으로 전시되어 있다.

강제윤의 섬에서 만나다

“시아버지가 산길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호랑이가 시아버지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며느리는 업고 있던 아이를 호랑이에게 던져주고 시아버지를 살렸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아이를 살려 주었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며 절을 했다.” 술주정뱅이 시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죄 없는 어린것을 호랑이에게 던져준 행위를 효도라 할 수 있을까. 저토록 잔인한 이야기를 효행의 본보기로 전시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런 반생명적인 효도 교육은 당장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어느 생명도 존중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효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또 심청각 마당에는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드는 조형물과 함께 ‘심청의 효, 인류 구원의 불빛’이라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어째서 인류는 늘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타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받고자 하는가. 스스로 희생할 생각은 않고 희생양을 찾아내 인류의 짐을 떠넘기려고만 드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인류가 심청을 바다에 던지고도 여전히 뉘우치지 못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강제윤 시인·〈올레 사랑을 만나다〉 저자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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