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2.24 19:17
수정 : 2010.02.24 19:17
[매거진 esc] 남기자 M의 B급 마초
근육은 본디 ‘진짜 남자’의 상징이었다. 발끈하지 마시라. 여기서 진짜 남자란 육체노동자를 가리킨다. 몸으로 밥을 버는 사람은 필요한 근육만 기른다. 어부는 손으로 그물을 잡고 잡아당긴다. 악력과 당기는 힘을 쓴다. 악력과 관련 있는 근육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의 전완근이다.(뽀빠이의 팔뚝을 생각해 보시라.) 프라이팬을 종일 들어야 하는 요리사도 전완근이 발달했다. ‘기술’이 들어간 스포츠도 비슷하다. 잡고 던지는 유도선수는 전완근과 이두박근을 많이 단련한다. 타격가인 권투선수는 미는 근육인 삼두박근과 어깨근육을 더 신경 써 단련한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남자에게 근육은 재킷 같은 존재다. 비(B)급 마초건 에이(A)급 마초건 이제는 모두 ‘짐’(gym·체육관)에 가지 않고 ‘피트니스’(fitness)센터에 간다.(가서 몸을 피트하게(알맞게) 만든다.) 그러므로 근육 자랑하는 비급 마초를 비웃지 마시라. 여성들이 예쁜 옷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일 뿐.(유치하지만 귀엽지 않은가.) 바람이 쌀쌀한 5월부터 민소매 티셔츠를 입는 남자의 심리가 여기 있다.
물론 근육 자랑하다 뜻하지 않게 낭패를 보기도 한다. 아이엠에프가 막 끝난 뒤 복학했다. 죄다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거나 고시 책을 끼고 다녔다. 어학연수는 기본이었다. 나도 어학연수 길에 올랐다. 2002년 10월 비행기에서 내린 필리핀 마닐라 공항은 거대한 가습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후텁지근했다. 저렴한 일대일 수업을 특장으로 내세운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한 필리핀 남자 강사와 친해졌다. 어느 날 그가 다닌 대학에 놀러 갔다. 영어연극을 보기로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더웠다. 오후 6시 무렵 학생들이 줄을 섰다. 나는 민소매 티에 단추를 채우지 않고 반소매 셔츠를 걸쳤다. 밑엔 청바지. 목걸이를 한 센스에 제법 자부심까지 느꼈던 것도 같다. 더운 척 반소매 셔츠를 벗었다. 시선을 즐길 준비를 했다. 엥? 몇몇은 무시했고 일부는 수군거리며 키득거렸다. 영어연극은 위대한 문제작이었으나,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음날 일대일 수업을 하러 남자 강사의 방문을 열었다. 공항에서 짐 찾는 법, 미용실에서 쓰는 표현, 따위를 배우다 문득 그가 화제를 돌렸다. “어제 내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하던걸? 너 몸 좋다구.” “근데 나 몸 좋은 거랑 그게 무슨 상관 있니?” “네가 내 애인인 줄 알았대, 하하.”
강사는 게이였다. 근육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패션은 이 나라에서 종종 게이 코드로 받아들여짐을 처음 알았다. 그 뒤 민소매 티에 목걸이를 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다. 게이로 오인당한 게 기분 나빠서가 결코 아니다. 그런 패션이 나와 어울리지 않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도 이유다. 그리고 근육이 오로지 남자다움만 상징하는 건 아님을 깨닫고 딴엔 반성중이다.(근육은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 한 게 낫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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