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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4 19:53 수정 : 2011.05.01 19:05

박원순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치우쳐 있다”며 “나는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이며, 나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변호사가 꿈꾸는 ‘시민이 주인 되는 사회’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46화 온갖문제연구소장 '원순씨'

갖은 일에 관여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 셋이 별명을 두고 다투는 일로 ‘직설’은 시작됐다. 손님 박원순(55) 변호사는 시민운동, 동네 경제, 정치 등을 넘나드는 화제를 꺼내면서 자신의 별명이 ‘여러문제연구소장’이 됐다고 밝혔다. 서해성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이미 십수년 전 황석영 작가가 자신에게 붙여주어서 신문 등에 ‘공표’된 직함이라고 했다. 근래에는 <한겨레> 지면에 칼럼을 쓰는 김정운 명지대 교수가 등록을 해서 쓰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자, 박 변호사는 그렇다면 ‘온갖문제연구소장’으로 하겠다며 물리려 하지 않았다.

인권변호사, 참여연대 사무총장,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희망제작소 소장을 거쳐 ‘소셜 디자이너’로 진화한 박 변호사. 그를 특정 직함이나 영역으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그는 소년 눈빛이었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기에는 언어가 너무 선량했다.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 한홍구 또한 갖은 방면에서 활동을 하는지라 셋의 대화는 온갖 것을 섭렵하는가 싶더니, 문득 한군데로 몰입해 들어갔다. 박 변호사가 아직 한번도 도전하지 않고 있는 영역, 정치. 한홍구·서해성은 집요했지만 이 대목에 이르면 박 변호사는 웬걸 의뭉스러워졌다. “모든 일엔 양면이 있다”며 자신은 중간지대에 있는 게 운명이라고 응수했다.

그의 바쁜 일정 때문에 동틀 무렵 시작된 직설은 예정을 넘겨 점심 무렵에야 끝이 났다. 아침을 함께 고구마로 때운 그는 곧장 희망을 전파하러 경기도 양평을 향해 달려갔다.

참, 숱한 호칭 중 가장 맘에 드는 건 ‘원순씨’라고 했다. 호칭이 공평할 때 세상사가 공평하단 뜻일 게다, 필시.

진행·정리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아직 국정원과 소송이 진행중이죠?(2009년 “국정원 사찰로 시민단체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박 변호사의 발언에 대해 정부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박 변호사가 승소했으나 정부의 항소로 2심이 진행중이다.)

박원순(이하 박) 국가라는 건 주권자인 국민의 비판과 감시 아래 작동하는 기구이고, 비판을 수용해야 하잖아요. 그걸 재판부에서 받아들인 겁니다. 논리 이전에 상식이란 게 있죠.

한홍구(이하 한) 정부 비판은 군사독재 시절에 더 많이 했는데도 명예훼손으로 잡아들인 적은 없죠.

국가가 인격체라서 명예훼손을 당했다면, 국가에 양복을 입히거나 수갑을 채울 수 있거나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엠비 정부 들어 기이한 소송이 제기된 사례가 유독 많은 까닭은 뭘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폭소)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과 온갖문제연구소장이 모였는데 (그런 것도) 얘기해야지.(웃음)

MB씨, 원순씨 아이디어에 로열티 내셨나요

엠비 정부가 걸핏하면 하는 얘기가 법치인데.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데, 권력과 돈 있는 사람은 법망을 피해가잖아요. 법치 강조가 힘없는 서민만 법 지키라는 얘기가 될 가능성이 높죠. ‘법 지키면 손해’라는 인식이 대부분인데, 이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죠. 법 불신, 사회 불신, 불신공화국이죠.

자기 공약을 뒤집고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는 양반이 대통령을 맡고 있으니.

자동차 운전하면서 신호등을 믿고 직진하잖아요. 아니면 길은 엉망이 되죠. 오늘 한국 사회가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노무현 정부를 흔히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고들 했는데, 엠비 정부는 비상등 켜고 신호 무시한 채 자기 친구 몇 태우고 마구 달리는 격이죠.

희망제작소 활동 등이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없는데도 왜 ‘간택’됐을까요?

거기다 물어보셔야지. 오늘 주인공 잘못 선택한 것 같아.(웃음) 희망제작소 하면서 아이디어와 혁신으로 새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마이크로크레디트(저소득층 소액대출)를 통해 소기업을 진작시켜보자고 했고, 이런 생각을 하나은행 강연 때 했더니 다들 좋아해서 1년 준비 끝에 ‘하나희망재단’을 만들었어요. 행장 2번 바뀔 동안에 기자회견도 2번이나 했는데….(하나은행은 희망제작소와 추진하던 사업을 중단하고 현 정부와 하나미소금융재단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외압 의혹이 제기됐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참 아쉽고도 안타까웠어요.

지역의 다양한 축제와 특산물 정보 등을 한번에 알 수 있는 ‘지역홍보센터’를 만드는 사업도 날아가버렸고.(박원순 변호사의 제안으로 행정안전부와 함께 프레스센터에 지역홍보센터를 설립하고 희망제작소가 3년간 위탁운영하기로 했으나 1년 만에 계약이 해지됐다.) 또 마을기업을 만드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주창했어요.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그 사업을 시작했고, 이번에 행안부가 1천억원을 풀어요.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비영리단체로 모시는 ‘행복설계아카데미’도 있어요. 이것도 보건복지부가 일부 가져갔다고 하더라고요. 크게 보면 되긴 됐죠, 허허.

정권 바뀔 때 희망제작소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영향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나요?

오히려 잘 될 거라고 봤죠. 희망제작소 정책 중에 한국 사회의 도약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많다고 여겼어요. 정부가 싫어하면서도 우리 정책들을 가져가기도 했잖아요.

아이디어 공유 정신이 너무 빼어난 분들이 많아요.(웃음) 그런 경험이 저도 있고, 또 많이 들어서 알고 있죠.

어차피 아이디어는 나누기 위한 거니까.

최소한 ‘원순씨네 생각을 빌려 쓴다’라고도 하지 않으니까 문제죠. 자기 것들은 철저히 틀어쥔 채. 실은 그게 ‘지적 절도’에 해당하는데.

로열티 좀 받아 주세요.(웃음) 

정치? 대체재 부족한 여기 있을래요

원순씨야 정말 좋은 일 많이 해오셨는데, 조금 아쉬웠던 점이 있어요. 촛불시위 이후 유모차 엄마들 불러다 조사할 때 나서주셔야 했는데…. 그렇게 무기력하게 밀리다 보니 정부가 방자해져 시민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걸게 됐잖아요.

엠비정부가 권위주의적 정책을 편 것에 대해 발언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방해를 받고 어려워졌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투쟁을 이끌거나 하는 게 적절할까 하는 고민이 심각했던 건 사실이죠. 시민사회든 사회 전체로든 역할 분담이 있다고 생각해요.

역할분담이라. 아이고, 나는 직설만 떠들어댈 팔잔가 봐요.

용산 참사나 쌍용자동차 파업 뒤 열네 분이 돌아가시는, 생존권과 생명권이 박탈되는 위기의 시대거든요. 올해 말 가계부채가 국가예산의 거의 3배인 900조원에 이를 거라고 예상할 정도죠. 빈부격차 가속화에, 사실상 국가부채가 1637조원을 넘을 거라는 주장(이한구 한나라당 의원)마저 있었어요. 지역갈등에 기초한 선거라는 분할통치 수준으로 (이런 상황을 덮는 게) 통할지 의문이죠. 조건만 보면 가히 폭동 전야라고나 할까. 시민운동으로는 한계 같은 걸 느끼게 되는데요.

지금 위기는 본래 신자유주의 정책이 양극화를 심화하는 측면과, 이 정부가 외환정책을 통해 수출 대기업들만 잘되게 하는 두가지 측면이 있죠. 시민경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회진보나 복지를 중시하는 정부가 필요해요. 시민이 주체가 되는 경제 틀을 만들고 확대하는 건 시민사회 몫이죠. 여야를 들여다봐도 그런 준비나 대안을 만드는 과정이 없지 않나 싶어요.

대안과 준비라는 게 결국 정책과 인물일 텐데, 원순씨에게 기대가 쏠리고 있는 면도 있고.

아직도 있나요!(웃음) 정권 창출을 넘어 우리 사회가 채워가야 할 시민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누군가는 일을 해야 되잖아요. 기본적으로 새로운 시민경제, 시민자본을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겠고, 좋은 정부를 만드는 일에 도움을 드리고 할 생각입니다.

항간에선 ‘박원순이 나서는 게 낫지 않나’ 하는 말들이 돌곤 하죠.

이러니까 국정원이 저러고 있는 거지! 날 좀 자유롭게 해주세요.(웃음) 이런 얘기들이 나와서 괜히 시비 걸고 먹칠하려는 일들이 생기는 게 아닌가도 싶어요.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것들은 나눠주고 원순씨는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는 거죠.

아무리 유도해도 안 돼!(폭소) 정치권은 사람도 많은데 시민사회는 대체재가 부족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요.

20여년 전 태어난 시민사회의 영욕을 최일선에서 지켜본 사람인데, 그간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했다고 보시는지?

한국 사회가 워낙 중앙집중적이다 보니 국회나 정부를 압박해서 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운동은 잘해왔다고 봐요. 대신 상대적으로 풀뿌리운동이 성장하지 못했어요. 2000년 낙선운동의 경우 중앙정치를 완전히 흔든 거잖아요. 그게 지역에서 유권자를 조직화하고 정치인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면, 정치가 완전히 달라졌을 거예요.

지역이 희망이라는 점은 동의하지만, 현실을 보면 지방자치와 지방분권화의 과실은 토호들이 다 따 먹었죠. 민주화 되고 제일 덕 많이 본 게 재벌과 수구언론인 것처럼.

그 말이 곧 풀뿌리강화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죠. 반대로 전북 완주나 진안의 선진적인 마을 만들기, 농업기술학교를 중심으로 한 충남 홍성의 농촌유기체, 서울 마포 성미산공동체 등은 좋은 사례죠. 서울 관악·강북·도봉구 등에서도 주민들이 개미처럼 움직이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가고 있어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따로 또 같이 

풀뿌리와 생활이 강해야 사회도, 정치도 튼튼해진다는 말로 일단 정리해 두겠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절차민주주의는 확보되었지만, 자본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요. 그 무렵 한국 사람 7할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했어요. 민주화 달성이 그런 꿈과 가능성을 열어준 거죠. 그 기대와 확신은 지금 곤두박질치고 있죠. 민중운동과 분화된 뒤 시민운동이 갖는 한계나 연대 같은 걸 짚어보죠.

중요한 지적인데, 참여연대를 처음 시작할 땐 민주노총과 1년에 한번 정책조정회의를 했어요. 상호협의체죠. 민중운동도 주택·교육·물가 같은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면 좋을 텐데, 현장문제에 집중하면서 대중의 보편적인 관심사로부터 멀어졌잖아요. 반대로 노동3권만큼 중요한 시민권이 어디 있습니까. 함께 풀어가야 할 것들이 참 많죠.

시민운동이 처음 등장할 때 민중운동을 공격하면서 입지를 세웠잖아요. 원래 하나였다가 시민운동이 떨어져나가니, 노동운동은 더 현안 중심으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된 거죠.

노동 쪽에서는 지난 정권과 엠비 정권의 차이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말들마저 있죠. 한진중공업의 경우 91년도엔 박창수 위원장이, 노무현 정권 때는 김주익 위원장이 골리앗크레인에서 세상을 떠났죠. 이 순간에도 김진숙 운동가(민주노동 부산본부 지도위원)가 100일 가까이 거기 올라가 농성중이고요.

맞아요. 어쨌든 사회적 연대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원순씨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경험이나 명망성 등에서 두루.

내가 에이(A)형이에요.

혈액형까지 나오네!

난 조그만 내 일을 해나가는 게 꿈인데, 앞장세우려고 하는 것 때문에 늘 괴로웠어요. 난 그런 사람이라니까. 더구나 시민운동 핵심 부문으로 보면 뒷방마님이 된 것이고요.

시민운동의 1세대, 주창자, 나이에 맞지 않게 이미 ‘원로’가 되어버린 입장에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하나가 되는 데 역할을 해 주셔야 한다는 거죠.

못할 일은 아닌데, 그러면 후배라는 사람들이 뒤에서만 얘기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제안을 해서 나를 업던가 해야지.

한/서 등판 넓은 사람 찾아야겠군.(웃음)

제가 그런 자격이나 리더십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일이라면 못할 건 없죠. 사실 시민운동은 재정위기를 겪는 데 반해, 민중운동은 자기 대중이 확실히 있고 더 강하죠. 둘이 함께하면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 생각하고요.

자유무역협정 등 국경 없는 자본의 약탈에 맞설 수 있는 시민운동의 역할은?

가령 아름다운가게는 영국의 구호단체 옥스팸과 함께 갠지스강 연안의 홍수 예방을 돕는 ‘나마스테 갠지스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2006년에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정작 아시아에 한 게 없어 죄책감이 있었어요. 앞으로 ‘아시아민주주의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일본과 형성하고 있는 네트워크 협력체제를 중국과도 가져야죠. 중국 시민사회가 성장해야 동북아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개별적 국제이슈 참여를 넘어 한국 시민사회는 충분히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봐요.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거의 동시에 이뤄낸 한국의 경험이 균형 있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개발독재 모델로 돼버린 것에 대해 시민사회가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죠.

우릴 뒤따라오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고민이 있다니까요. 그러니 여러문제연구소장 안 할 수 없죠. 하하.

‘박원순’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기부죠. 징세가 제대로 된 사회는 기부의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정부의 세금정책이 제일 중요하죠. 그게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시에 정부가 아무리 잘해도 틈새가 많아요. 이걸 메우는 역할을 기부문화가 만들어내거든요. 캐나다 시민단체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캐나다’는 준정부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밤길 안전을 강화하고 대안교통수단 비율을 높이는 방법까지 고민해요. 영국 정부는 ‘자산양여법’을 만들어 마을회사에 국가 재산을 넘겨요. 정부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시민사회시대인 21세기는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가야 한다는 거죠.

그 말을 종합하면 ‘어나더 거버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별명 하나 더 붙여드립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어요. 기존 정부 역할이나 한계는 늘 지적되어 왔잖아요. 선진적인 나라일수록 시민사회가 ‘어나더 거버먼트’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또는 ‘어나더 코퍼레이션’, 또다른 기업인 거죠. ‘어나더 월드’, 또다른 세상. 자꾸 정부에 나를 묶어두지 마세요.(웃음) 정부 외에는 공공적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고, 기업이 아니니까 영리활동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거의 5년마다 새 영역을 만들어왔습니다. 희망제작소도 정착 단계인데 다음은 뭔가요? 

헌법 1조를 ‘모든 국민은 소기업 사장이 될 수 있다’로

우리나라는 대기업만 있고 지역에는 기업이란 게 없어요. 특히 온 주민이 하나씩 기업을 만들어야 해요. 기업이 별게 아니에요. 집에서 컴퓨터 한 대만 놓고도 시작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이 ‘1천개 직업 만들기’ 사업으로 실현됐고요. 제가 늘 사람들한테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모든 국민은 소기업 사장이 될 수 있다’로 바꾸자는 농담을 해요. 제가 ‘돈독’이 좀 올랐다니까요.(웃음) 또, 우리는 늘 소비자로 경제활동을 하는데 이게 뭉치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요. 100만명이 뭉치면 학교·법률·의료·주거·장례까지 모든 게 가능하잖아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이라든지 시민경제, 시민자본, 은행도 만들려고 해요. 단, 착한 은행.

시민이 주체가 되는 길을 열어가는 새로운 희망, 어나더 거버먼트!

정치하겠다는 이는 많은데 대개 구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죠. 여러 정책 중 하나만 제대로 시행돼도 세상은 크게 바뀌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원순씨에게 기대하는 게 그런 거죠.

어찌 보면 소꿉장난 같은 일들이 영감과 변화를 만들어내거든요. 시민사회운동은 임기 같은 거 없이 지속할 수가 있잖아요. 정부나 정치 쪽 일은 평생 신나게 할 수 없고.

몇해 전 국회의원들에게 물으니 여야에서 다들 가장 친한 사람으로 원순씨를 꼽았습니다. 박원순을 롤모델로 삼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우리 사회에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나더러 시민사회 지도자, 아이콘이라고들 하는데 어떻게 제가 그렇게 될 수 있나요. 시민사회는 각개약진하는 거고, 각자가 중요한 걸요.

각개약진이든 뭐든 더 많은 원순씨들이 등장하길 바라면서 이야기를 맺습니다.

아무튼 오늘 잘 넘어갔죠?(웃음)

한홍구, 박원순,서해성
■ 직설잔설

반가운 그 말 “노동3권은 시민권이다”

본인은 부담스러워하지만 ‘박변’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었다. 허명을 얻은 사람도 많지만, 박변처럼 내실 있게 명성과 신뢰도를 쌓아온 사람도 없다. 나보고 그 많은 일을 언제 다 하느냐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박변에 비하면 나 바쁜 건 놀고먹는 수준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만이 아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든 것도 박변이고, 내가 지금도 매달리고 있는 국가보안법, 조작 간첩, 과거사 문제 등을 처음 시작한 이도 박변이고, 거기서 가장 뚜렷한 학술적 업적을 남긴 이도 박변이다. 그가 쓴 <국가보안법>(전 3권)과 <야만시대의 기록>(전 3권)은 필독서를 넘어 고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확연히 갈라져 있는 점이었다. 민주화 이후 우아한 ‘시민’들은 과격한 ‘민중’들과 선을 긋더니 결국 딴살림을 차렸다. 노동자 10만명이 머리띠 두르고 팔뚝질 열심히 해도 신문에 한 줄 나지 않는데, 참여연대 회원이 ‘1인 시위’를 하면 세상이 바뀌고 신문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둘은 원래 하나였다. 둘이 하나였을 때, 김주익은 피고인으로, 노무현은 변호사로 한 팀이었을 때 그들은 승리했고, 각각 노조위원장과 대통령이 되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주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될 만큼 세상이 바뀌었는데, 노조위원장은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고, 128일을 버티다가 목을 맸다. 대통령이 된 노동변호사는 옛 의뢰인의 죽음에 “이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도 퇴임 뒤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왜 하나여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그런데 어디서 하나가 되어야 할까? 누가 누구에게로 다가가야 할까? 박변이 노동3권만큼 중요한 시민권이 어디 있냐고 먼저 말한 건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위해 시민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김주익이 목을 맨 그곳에서 김진숙이 농성 100일을 맞고 있다.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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