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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인천에서 노동·지역운동을 해온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무슨 일이든 작게 시작하되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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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 인천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에게 듣는 지역운동과 노동운동 36년
[한홍구-서해성의 직설]제49화 한땀 한땀 엮은 지역운동 모두가 ‘지역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시대에, ‘직설’은 조용하게 퍼지는 지역운동의 저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지용택(74)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나러 인천으로 갔다. 그는 1975년 노동자 자녀를 돕기 위해 ‘새얼장학회’를 만들었다. 1983년 “시민의 힘으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갖고 ‘새얼문화재단’으로 확대했다. 36년이 흐른 지금 1만명이 넘는 회원이 동참하고 있다. 해마다 여는 ‘가곡과 아리아의 밤’은 27년, ‘국악의 밤’은 20년, ‘새얼백일장’은 26년째 이어가고 있다. 계간 <황해문화>는 18년째다. 무엇보다 25년 동안 한달에 한번 명사를 초청하는 ‘새얼아침대화’는 최근 300회를 돌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 무엇도 꾸준함을 이길 수 없다. 진행·정리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오는 길에 떠오른 말이 ‘인천 다마(당구)는 짜다’였습니다.(웃음) 당구 칠 때 인천내기들이 자기 평균 점수를 깎아 말한다는 뜻이죠. 지용택(이하 지) 염전이 많은 탓인가요.(웃음) 짜지 않고 오히려 맹물 아닌가. 그래도 그 말이 맞다면 아마도 어려울 때 인천 사람들이 아끼고 산 까닭이 아닌가 싶어요. 사람이 아니라 삶이 짜야 했던 거죠. 한홍구(이하 한) 토박이만이 아니라 전쟁 통에 여러 지역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다 보니 여러모로 삶이 짜질 수밖에 없었겠죠. 지 북에서 피란 내려온, 아무래도 황해도 출신들이 많았죠. 지척이 고향이잖아요. 부두만 나가면 먹고살 거리가 있었어요. 서울과도 가까웠고.
서 인천은 길(경인철도·항구)과 맛(자장면)은 물론 좋든 싫든 근대의 들머리여야 했습니다. 일본인을 포함한 식민지 침략자, 서양인, 선교사, 의사, 일찍부터 와 있던 청나라 사람들, 피란민, 근래에는 중국인과 중국 동포, 이주노동자들이 섞여 살고 있는 터전입니다. 판사 가르치다 법정구속된 사연 지 인천 사람들은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인지 몰라도 바깥사람이라고 박대하기보다는 함께 잘 지내왔다고 봅니다.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한 가령 만보산 사건(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 출신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벌어진 유혈사태)으로 불거진 한국인의 중국인에 대한 테러는 평양이 가장 셌고, 인천이 그다음쯤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꼭 한 번 짚어봐야 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 ‘호떡집에 불났다’는 말이 그때 나온 ‘고사성어’죠. 지 그 일은 겪지 못했고, 들어서 알고 있지요. 그건 ‘특별한 오해’에서 비롯된 가슴 아픈 식민지 기억이지요. 그런 경험까지 인천은 자양분으로 삼아서 성장해왔다고 봅니다. 인천 자체가 역사적으로 국제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겠죠. 한 그때 중국 사람이 200명이나 죽었어요. 우리가 다른 인종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대목이죠. 지금은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가 급속히 늘고 있잖아요.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이들에 대한 추방운동도 나오고요. 서 자장면의 원조라는 ‘공화춘’의 옥호는 중화민국 출범을 기념해 붙인 이름인데요, 산동면을 오래도록 한국인들이 먹어왔잖습니까. ‘공화’를 모색해나갈 수 있는 지혜 같은 게 인천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이 이미 다양한 족속이 섞이고 모여 사는 곳이 되었으니 말이죠. 오늘 그런 걸 얻어가고 싶습니다. 한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살아오신 내력에서 얘기를 끌어내기로 하죠. 5·16 쿠데타 직후 이른바 혁명 검찰부에 끌려갔죠. 지 3·15 부정선거 당시, 몇해 전에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었던 ‘창사회’에서 인천 최초로 공회당 앞에서 규탄 전단을 뿌렸지요. 혈기가 넘쳤죠. 신흥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권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청년대회도 개최했어요. 나중에 검사가 그러더군요. “대한민국에서 네가 사회 고발 1호다.” 한 4·19혁명을 주도한 학생 지식인들 중에서 드물게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는데요.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었는지요? 지 어떤 이들은 정치인 비서로 들어갔어요. 그런 게 탐탁지 않더라고. 능력도 없었지만, 결국 평생 정치에 몸담지 않게 된 거죠. 자동차노조운동을 시작했는데 ‘준법운행투쟁’을 했어요. 모든 교통법규를 그대로 지켰지. 학교 앞 속도제한 있으면 그대로 따르고. 그러면 월미도에서 용산까지 세 배나 더 오래 걸려요. 서 도로교통법 다 지켰더라면 한국 산업 발전속도가 그만큼 늘어졌겠죠. ‘빨리빨리’ 나라에서 속도준수투쟁은 무기죠.(웃음) 지 근데 사쪽에서 불법파업이라고 고발해서 약식명령으로 벌금 5000원이 나왔어요. 정식재판을 청구했죠. 그때 판검사는 노조법이 뭔지를 모르는 거야. 노조법을 달달 외워서 법정에서 큰소리쳤죠. 그러다 법정구속 되고.(웃음) 한 요즘 노동운동하는 분들과 어떤 차이 같은 걸 느끼는지요? 지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가 ‘노동3권이 있다고 해서 그걸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지 말라’는 거예요. 파업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해요. 제도적인 걸 연구하면 여러모로 허점을 잡아낼 수 있는데, 노사교섭 들어갈 때부터 파업을 전제하고 들어가요. 처음에야 시민들도 박수를 보내지만 두세번 하면 그게 되겠어요?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렇거든요. 동아시아의 지중해, 서해는 황해다 서 지식인이 노동현장을 택하는 경우는 대개 사상적 결단이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 같은 게 있어야 하는 법인데요. 지 내가 노동자 아들이에요. 아버지도 지금으로 치면 항운노조 분회장쯤 됐어요. 어려서부터 톨스토이를 즐겨 읽었는데, 항상 약자 편에 서야 한다는 의식이 가슴에 있었어요. 한 당시는 농민이 절대다수였습니다. 학생운동도 농촌활동 중심이었죠. 일제부터 노동운동이 있었는데,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이 완전히 말살되고, 한국노총이 노동귀족으로 등장했죠. 4·19세대는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요? 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노동문제를 해봐야겠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존중은 해주면서도 자기네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했어요. 노동운동이 부각되고 나서는 잘 간 거 아니냐고들 그랬죠. 서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 입산자들을 보면 국졸 이하 농촌 출신이 다수였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노동자 출신이 유일하게 많은 지역이 인천이더군요. 지 인천에는 노동자도 많았고, 노동운동 전통도 남다를 수밖에 없죠. 부두노조는 인천항 역사만큼이나 대단했죠. 한 근대사에서 인천은 격동을 겪었고 큰 인물도 많이 나왔습니다. 지 죽산 조봉암, 장면(제2공화국 국무총리) 같은 이들이 인천 출신이에요. 해방 이전 사람들이죠. 묘하게도 북으로 가거나, 온전히 성공하진 못했어요. 해방 이후로는 그다지 큰 인물이 안 나왔고. 인천이 한반도 중심인데 분단이 되면서 중심 역할을 못하고 있죠. 김대중 정부 이후로 기대를 걸고 있던 참인데, 인천과 해주 사이에 물류가 오고 가면 황해 섬들은 황금 섬이 될 거예요. 서 휴전선이 희미해진다면, 남북만이 아니라 중국·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지중해로서 황해와 인천은 물적·인적 거점으로 지금과 비길 수 없는 위치가 되리라고 봅니다. 지 우리나라 바다는 동해, 서해, 남해 모두 보통명사예요. 바다 이름이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일본은 동해를 일본해로 부르죠. 고유명사예요. 서해를 황해라고 불러야 해요. 이런 이름을 우리가 확보해야 하는 거죠. 한 어디 가서 계간 <황해문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바다를 떠올리기보다 ‘황해도’ 연고를 가진 사람들이 내는 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웃음) 서 인천의 자랑인 새얼문화재단의 모태랄까요, 새얼장학재단은 어떻게 탄생했는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준 돈으로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지 당시에는 교통사고가 나면 운전기사를 무조건 구속했어요. 교도소에는 운전기사 600명 정도가 항상 갇혀 있었죠. 그들에게 담요를 주는 운동을 하다 그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새얼장학회를 시작했죠. 노조가 아니라 바깥에서 돈을 모아왔죠. 장학재단을 만든 뒤 노총 간부들이 청와대에 갔는데, 박 대통령이 노동자들이 재단을 만든 게 진짜냐고 세번이나 묻더라고요. 그때 통치자금에서 15억원 타냈죠. 그 돈으로 한국노총 장학재단을 만들었어요. 새얼장학회는 그 돈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민간에서 모금한 거고요. 한 80년 5·17 이후 한국노총 사무총장을 본의 아니게 그만두고 역할을 전환하게 되는데요. 지 한땐 자동차노조의 뜻에 따라 한국노총 위원장이 정해진다고 할 정도로 힘이 있었어요. 노총 사무총장직은 오래는 못했어요. 외부 견제가 심했고, 하는 일마다 제동이 걸렸어요. 전두환이 대통령 되던 1980년 8월, 결국 산별노조 자체가 해산되고 말았어요. 서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장학재단을 만들고, 길이 막히자 지역운동으로 바꿔 36년이란 긴 세월을 활동해왔습니다. 이처럼 꾸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지 별거 없어요. 뭐든지 쌓여야 한다는 뜻으로 꾸준히 했어요. 인천에서 돈 벌고 서울 가는 사람들이 “인천에 정체성이 있나, 원로가 있나” 이런 얘기를 해요. 인천은 사람도, 뿌리도 있어요. 그걸 알리고자 시작했지요. 인천이라는 깃발을 든 사회단체가 지금은 200개가 넘지만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어요. 기차 위에서 삽으로 석탄 푸던 그 청년을 찾습니다 서 한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는 듯합니다.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지 항만에 군사물자가 들어오면 영어 몇마디 알아서 그걸 분류하는 일 하는 사람이 돈 버는 시대였어요. 인천항에서 석탄 실은 기차가 서울로 출발하면 청년 하나가 화차로 뛰어올라가요. 삽으로 막 석탄을 퍼내는 거야. 그러면 ‘치마부대’ 아낙들이 흩어진 석탄을 주워 모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그랬어요. 그때는 그런 걸 도둑질로 여긴 게 아니라 수완이 좋다고 여기던 때였어요. 서 항만으로 이어지는 철로를 따라 담을 친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암튼 그 청년은 어찌 되나요? 지 어느 정도 눈감아준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라도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붙잡으러 올 때쯤 청년은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그가 누군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 청년 몫은 얼마나 됐을까. 서 ‘삽으로 석탄을 푼 청년을 찾습니다!’ 광고라도 내야겠군요.(웃음) 지 그렇게 물자 빼내서 돈 번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사돈 안 맺었죠. 자기가 한 일은 잊어버리고 말이죠.(웃음) 그렇다고 인천의 뼈대 있는 집안과 엮일 수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인천을 뜨더라고. 그러다 보니 인천에 정체성이 뭐 있냐는 소리도 들리고요. 그래서 인천 정신 같은 걸 만들어보자고 했던 거죠. 서 신도시가 된 송도가 일본말 ‘마쓰시마’에서 유래된 거잖아요. 서울 여의도 윤중로(강섬 둘레를 둘러서 쌓은 제방길)는 박정희 정권 때인데도 일본식으로 이름을 지었어요. 그냥 강둑길이면 되는데. 지 부끄러운 얘긴데, 지명 고치는 게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하더군요. 송도에 대해 시민들이 항의하고 있어요. 여러 사례를 묶어 한꺼번에 해결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한 지명 바꾸는 게 어렵다지만, 집값 문제가 걸리면 다 바꾸더라고요. 서울 관악구의 신림동·봉천동 다 바뀌었잖아요. 서 제가 사는 아파트는 영어로 이름이 바뀌었어요.(웃음) 한 인천 시민운동의 독보적인 존재이지만, 280만 시민들 중에 새얼문화재단의 존재를 얼마나 알까요? 지 며칠 뒤면 백일장이 있는데 중고생보다 초등생 참가자가 적어요. 교사들이 인솔하기 귀찮아서 안 오는 거거든요. 이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서 강화군청 고용원, 면서기, 대서보조원 일을 하다 민족해방운동을 하고, 해방 뒤 농지개혁을 주도한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해오셨습니다. 지 높은 빌딩이 많은 게 좋은 도시는 아니죠. 좋은 사람이 살아야 좋은 도시입니다. 인천지역에서 먼저 살았던 분들이 좋은 분들이어야 해요. 장면과 조봉암이 뒤집어쓴 오해는 벗겨줘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서 죽산 선생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민주주의가 6월항쟁을 통해 그 최소한이 확보되었다면, 균등경제와 평화통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지 죽산은 김구·김규식 선생을 이은 평화통일운동을 한 사람이지요. 나로선 인천에서 출생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평화통일을 말해온 이분을 기려야겠다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죠. 죽산 선생이야 재판받을 때 학생 신분으로 법정 가서 뵌 게 전부죠. 11년 전에 강화에 추모비를 세웠어요. 머잖아 동상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 동네 어른을 후학들이 기리겠다는 겁니다. 한 추모비를 세웠다고 추모가 되는 건 아니죠. 생각이 다른 세력들이 추모비를 부수거나 한다면 오히려 욕보이는 거잖아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비 하나는 세울 곳을 못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았죠. 죽산 추모비는 우파들도 참여했다는 게 뜻깊습니다. 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무덤에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봉암 선생은 재심으로 무죄가 났습니다만, 기부 액수나 이념을 떠나 함께 추모하는 일은 분단 이후 갈등을 치유하는 의사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고 여깁니다. 지 조용하게 잘 해볼게요. 어떤 물도 마다 않는 바다처럼 지역운동을 하겠다 서 죽창 든 고부 동학군을 이르는 말에 ‘서면 죽산, 앉으면 백산’이라고 했는데, 죽산 선생은 지난 50여년 동안 백산으로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비로소 죽산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합니다. 한 며칠 전 재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지 야당이 아니라 실은 유권자가 이긴 거죠.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 시민들은 정말 내 어려움을 해결할 사람이 누군지를 찾아요. 야권통합만 하면 이긴다는 안일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그걸 유일한 방법으로 갖고 있다면 결국 지는 거예요. 얼마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명박 정부 경제에 대해 “낙제점은 면했다”고 했는데, 난 대단히 불쾌했어요. 재벌이 너무 오만하단 말이죠. 야당도 그 발언에 대해 같이 비판해야 마땅한 거죠. 한 역사에서 눈여겨볼 건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들입니다. 죽산이 죽을 때 이승만 혼자 했겠습니까. 말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저 방관한 직무유기가 있죠. 민주당도 삼성이 이명박 정부 비판했다고 좋아만 한 거죠. 그렇게 얄팍하게 가다간 다음 대선 이겨도 금방 정권 내줄 겁니다. 서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이 맥아더 장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 동상이 세워진 거야 그렇다 치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을 대표한다는 건 있을 수 없죠. 서 ‘해불양수’(물을 마다 않고 받아들여 바다를 이룬다)를 지표로 삼아오신 줄 아는데, 인천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포용하는 용광로적 특성을 잘 말해준다고 봅니다. 지 북에서 온 아이들은 물론 이주민 자녀들에게도 관심을 베풀어야 합니다. 어느 재단에 가서 “이 사람들을 껴안고 살아야지, 외면하면 앞으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해서 지원을 하게 한 적이 있어요. 인천정신이죠. 그나저나 나 같은 사람을 ‘직설’이 찾아와서 참 고맙습니다. 한 인천 시민들은 동네 어르신 제사를 많이 모신 어른이자, 아이들을 위해 일한 분으로 기억할 겁니다. 지 벌써 75살인데 난 참 부끄러운 게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덜 부끄럽고자 애쓰는 사람으로 알아준다면 더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변치 않는 한가지는 항상 약자 편에 서자는 겁니다. 서 인천은 근대 한국의 관문이었고, 인천 사람들은 시대를 여는 마중물이었습니다. 새얼문화재단 같은 마중물이 다른 지역에서도 두루 샘솟아 올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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