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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어체로, 우아 떨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지난 1년간 ‘직설’을 이끈 한홍구 교수(왼쪽)와 서해성 작가가 직설에 대한 자평과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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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50회의 직설에 마침표를 찍으며 ‘새로운 언어’와 ‘진보적 낙관주의’를 되새김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50화 직설, 그 마지막 뒷담화
<한겨레> 창간 23돌을 기념해 ‘직설’을 폐지한다.
농담이되, 빈말은 아니다. 정확히 23돌 기념 특집호 지면에서 마침표를 찍게 됐으니 말이다. 지난해 5월17일, 창간 22돌을 맞아 시작한 기획이었다. 애초 계획한 대로 50회를 꽉 채우게 되었다. 행복하고 고마워할 일이다.
사실 50회는커녕 5회도 못할 뻔했다. 제4화 ‘민주당 천정배 의원’ 편(2010년 6월11일치)이 나가자마자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독하고 비하했다는 이유로 유시민씨가 <한겨레> 절독을 선언했고, 이는 노사모로 옮겨붙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한겨레>는 그로부터 4일 뒤 1면에 사과문을 내보냈다. ‘직설’ 폐지를 넘어 담당 기자를 해고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부담스러움을 이기고 진행을 계속한 한홍구 교수와 서해성 작가, 기꺼이 초대에 응해준 이야기 손님들, 열성적 호응으로 용기를 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한국 사회의 위선과 말로 싸우기로 했던 ‘직설’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구어체로 떠든다. 둘째, 우아 떨지 않는다. 때로는 거칠고 상스러웠던 이유다. 이로 인해 끝까지 ‘안티’로 남은 일부 독자들도 있었음을 기억한다.
오늘은 마지막 뒷담화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기자가 직접 참여해 질문을 던졌다. 1년 50회를 거쳐간 사람들을 추억하며, 제대로 본질을 짚으며 떠들었는지 반성도 해보았다. 독자들이 두 사람에게 궁금했을 법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섭섭하신 분들을 위하여, 직설은 다음달쯤 부활한다. 책으로….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센 말로 한 해를 살았습니다. 직설이란 기본적으로 말이잖아요.
한홍구(이하 한) 못한 말이 아직도 많아요.
고경태(이하 고) 지난해 3월 두 사람이 함께 낸 사무실에 놀러갔더니 2인 신문을 만든다고 해서 이걸 대담 형식으로 싣자고 했죠. 그때 처음 생각한 신문이 지금에 와선 어떻게 달라졌나요?
한 우선 사진이 나간다는 것과 직설을 하다 보니 둘이서 자주 얘기하던 걸 1주일에 한번 얘기하게 된 거.(웃음)
서 언칠기삼, 말이 칠 싸움 기술이 삼. 양씨(건달)들도 먼저 말로 석죽이는 거거든. 말에서 지면 싸움에서 지죠. 엠비가 언론을 입 안의 혀로 두고자 하는 까닭도 다를 게 없죠. 이건 내 말만 들으라는 거죠. 조폭의 언어.
미안한 손님 강기갑… 큰 소리 오간 김성식
고 애초에는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 진보가 잃어버린 부분이 뭐냐를 말해보자는 의도가 컸는데.
한 세상에! 1년 전 기획서를 꼬깃꼬깃 들고 와가지고.(웃음)
서 엠비 정부 출범 직후 둘이서 한 ‘예언’인데, 민주화 이후에 나타났던 민주화운동가들, 이들을 포함해서 상당수들이 입을 닫을 것으로 봤어요. 침묵 예상자 이름까지 꼽아봤죠. 과연 여태까지 말이 없네요.(웃음) 빤한 엠비 공격이나 하자고 제안한 게 아니었죠.
한 노무현 시절 숱한 지식인들이 말의 성찬을 만들었는데, 촛불 끝나니 광야에서 떠드는 놈 몇 명 안 남아서 우리라도 해보자 한 거예요. 그런데 못한 게 많아. 삼성문제, 민주정권 10년 동안 진보적 지식인들의 역할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해놓고 못했고, 또 조·중·동 편집국장이나 대표 논객 모셔보자는 것도 뜻을 이루지 못했고.
서 그 침묵을 대신하고 싶었는데, 독자들께 불편을 끼친 적도 있었고, 목소리를 좀 내서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 그런 역할을 해냈다면 다행이고.
고 기자로서 종이신문이 갖는 보수성을 알고 있고, 도리어 그 때문에 파격적인 대담형식으로 한번 가보자 했죠. 또 하나는, 진보 내부를 뼈아프게 되새겨보자고 한 것이죠. 근데 제4화에서 ‘일’이 터져서 부담스럽게 되어버렸죠. 첫 회를 ‘한겨레 너는 누구냐’로 삼았던 것도 그 취지였는데, 그 뒤 방향이 주로 엠비 쪽으로 갔죠.(웃음)
서 1970~80년대는 ‘집안’ 얘기하는 데 익숙했죠. 또 그게 내용과 방향을 가려내는 힘이었고. 일이 나자 한 선배가 다급하게 “쥐를 잡으려다가 장독을 깼다”고 했어요.
한 서 작가와 둘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뒤 1년 동안은 애도기간을 갖자,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 칼을 겨누고, 노무현의 ‘과’에 대해서는 애도기간에는 거론하지 말자고 했죠. 1년 탈상을 하고 정권 내주게 된 과정에 대한 아픈 반성과 비판을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했는데 사건이 터졌죠. 정권 내준 집권세력을 비판하기 어려워지니 그보다 책임이 덜한 쪽을 비판하는 게 쑥스러워졌어요.
서 노무현의 죽음은 우리더러 더 치열하고 깊게 성찰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직설’을 하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정권을 쥐어본 자와는 토론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죠.
한 우리도 같은 상처를 받은 줄 알았는데…. 결국 유시민의 한계가 ‘직설’ 시작하자마자 ‘관 장사’ 파동 때 절독사건으로 한번, 직설 끝날 무렵(4·27 재보선)에 또 한번 드러난 게 친구로서 가슴 아프고. 노무현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좀더 건강하게 이 사회에서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행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서 국민이 보수를 선택한 것에 대한 반성 그 자세로 링에 올라갔는데, 초반에 센 펀치 맞으면 상대가 다르게 보인다고 하더라고.
한 때리기도 했잖아.
고 카운터펀치로 맞은 거잖아. ‘사건’ 나고 걸려왔던 전화 중 기억나는 게 “한홍구 쌤은 왜 그렇게 됐어요”예요.
한 그러니까 친구 잘 사귀라고 하는 거죠.(폭소)
고 그 무렵 꿈에 동굴에 들어갔어요. 박쥐 날아다니고 불상이 수십 개 서 있는데, 얼굴이 다 노무현이더라고요.
한 죄를 엄청 졌구만.(웃음) 우리가 차린 음식 먹고 알레르기 일으킨 거잖아요.
서 거기에 대해 미안한 거고. 우린 트라우마가 생긴 거죠. 가장 미안한 손님이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에요. ‘사건’ 직후라서 말이 제대로 안 떨어지더라고. 덕분에 셋이서 노 전 대통령 묘소 참배 가고 그랬잖아요.
고은·백기완·유홍준, 잊지 못할 구라 시리즈
고 다음 손님이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이었는데, 숫제 싸웠잖아요.
서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 한 선배는 얼굴 시뻘개지고 김 의원은 탁자 치고 일어나다 전등을 들이받았지.(웃음)
고 ‘직설’에 오는 손님들은 제법 용기가 있었던 거 같아요. 말발이 센 두 분 사이에 끼어 토론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거절한 분들도 꽤 있었죠.
서 첫 손님이 천정배 민주당 의원이었는데 ‘사고’가 났잖아요. 그럼에도 기꺼이 오는 손님들이 내심 놀라웠어요.(웃음) 나 같으면 안 왔어.
한 어려운 얘기를 쉽게, 세게 해야 하고, 다들 사명감 갖고, 고상하게만 계신 분들이 아니라 전선의 한 모퉁이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는 분들 모신 거거든. 정말 삶의 무게로 장풍을 날려주신 거죠.(42명 손님에게 박수)
서 고은·백기완·유홍준, 조선 장풍들을 모시고 삶으로 의제 이상을 구현해본 일은 잊지 못할 거예요. 세 분을 연타로! 한번쯤은 정리해보고 싶었거든요. 저 70~80년대를 헤쳐 온 ‘구라’의 힘. 진짜 ‘출연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
한 고은 선생 재밌었어!
서 그저 말이 시가 되는 ‘직설’이었죠. 독자 한 분이 리영희 선생을 ‘직설’을 읽고야 보내드리게 됐다, 돌아가신 분과 대담이라니 절창이었다고 보내온 적이 있어요.
한 그거 준비하느라 우리가 전집 갖다놓고 열심히 읽었지.
서 고 기자가 ‘빙의’라고 했어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솜씨를 보였죠. 아비 부재의 상실감에 사무쳐!
고 ‘직설’ 시작할 때 두 가지 원칙, 구어체로 한다, 우아 떨지 않는다고 했는데.
서 거룩한 먹물 매체 종이신문에 구어체는 소설이 아니면 실리기 어려웠죠. 이건 추임새도 들어가는, 그런 영역을 개척한, 일간지의 경쾌함을 확장한 건 분명하죠. 품격 없는 파격은 잡스럽기 십상이죠. 우아 떨지 않는다는 건 ‘새로운 우아’를 보여주는 일이어야 하거든요.
한 이렇게도 놀 수 있구나 하는!
고 직설의 상대말은 곡설. 또 다른 말은 은유. 근데 이건 직설이면서도 메타포가 있는 대담이었는데.
한 진짜 반대말은 침묵!
서 텍스트(기표)와 콘텍스트(기의)가 멀어질수록 대중은 세상 멀미를 심하게 하는 거죠. 멀미하면 차 타기 싫잖아요. ‘직설’이 멀미약 구실은 하지 않았나 싶어요. 구어체로! 또 멋만 부려서 현실에서 멀어지려는 메타포가 아니라, 의미역을 심화하고 심장이 벌렁거리게 하는 무기로서 메타포가 있죠. 1주일마다 살아 있는 메타포 하나 정도는 개발하고 싶었죠.
한 신문에 나오는 대담 같은 건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하는데 전달하기 어려운 말인 경우가 많죠. 대중들이 밥 먹으면서 얘기하는 그런 말들을 하고자 했죠. 우리가 치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손님도 이런 장이 잘 서지 않으니까 익숙지 않은 부분도 있었고.
한홍구·서해성은 어떻게 공부하고 소화하는가
고 서 작가와 ‘직설’ 하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공부하고 해석하고 현실에 대입하고 구현하는 노하우 같은 것이 있나요?
한 저 사람 미친 듯이 공부해!(웃음)
서 한 선배와 생활상 공통점은, 잠자는 시간 따로 없고, 좀 읽는 편이고, 커피 많이 마시고, 생활이 극히 단조롭다! 그나저나 현실에 쓸모없는 지식 따위 어디다 써요. 80년대가 남겨준 근육 아닌가요?
한 운동권 서생 마음을 잃지 않고 공부하는 거죠. 현장성. 뭐 하나를 챙겨도 어디다 써먹어야지! 하고.
서 다들 마르크스 무덤에 새겨놓은 말을 읊조리죠.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상이하게 해석해왔다.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바꾸자는 말에 방점을 찍는 건 좋은데, 창조적 해석 없이 새 세상으로 바꾼다는 건 당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이죠. 기이한 게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생동하는 새로운 해석이 ‘무덤’을 살려내죠.
고 궁금한 게, 어떻게 해야 책을 읽어서 잘 소화하나요?
서 현실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지워지지 않는 책 읽기가 아닌가 싶어요. 자기 호기심을 집요하게 구체와 연관시켜내야 하죠. 행동까지 이어가도록. 안내서 품고 가는 여행이란 이미 다 단물 빨아먹힌 거거든. 몇 해 전 난리 통에 이라크를 횡단했는데, 국민학교 때 노동하러 다녀온 사람들에게 들었던 풍월을 책자로 읽어오다 실행한 거죠. 비단길 관심이 옥에 갇힌 정수일 선생을 풀어달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한 거고. 얼굴을 나중에야 뵀죠.
한 대개 사람들이 읽은 양이야 상당하겠지만 영역이 넓지는 않죠. 현실적 필요성과 연관돼서 읽으면 남는 거고. 자기 내부에 정보를 갈무리해 둘 선반이 있어야 필요한 때 불러내고 연상이 되죠. 서 작가는 강호 고수를 남달리 많이 만나고 겪은 사람이기도 하죠. 그냥 보는 거랑 필요로 보는 게 달라요. 내가 한국 사회에 10년 공백 있어서 사람에 대해 궁금해 물어보면 판단이 정확하게 일치했어요. 친해지게 된 한 이유이기도 하고.
서 그 양반들이 ‘직설’ 할 때 큰 도움이 됐죠. 섭외나 뭐로나.
고 서해성은 작가라고 하는데 왜 책을 아직 한 권도 안 썼냐고 묻는 사람이 제 주변에 한둘이 아닙니다. 대답 좀 해주세요.
서 기왕이면 객담은 아니어야겠고, 아쌈한 걸로, 오래 씹을 수 있는 맛있는 걸 찾다 보니. 촛불, 쇠고기, 감시사회에 관한 걸로 올해 안에 한 권씩 돌리겠습니다!
한 서해성은, ‘직설’만 하기는 아깝지. 쌓여 있는 것도 많고, 이런 것들을 적절한 형식으로 뽑아내야 해요. 근데 관심이 너무 많은 사람은 뭘 못혀. 만날 이 일 저 일에 매달려 있기도 하니.
고 한 교수는 수구세력 기피 3관왕인데.(웃음)
한 국방부 불온도서, 친북인사 100인, 보수 쪽에서 이른바 ‘좌파 인물’ 15명을 선정한 책 <억지와 위선>에 모두 들어간 게 나밖에 없더라고요.
고 근래 지식인 중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체복무제 도입 운동,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을 비롯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 국정원 과거사진실위 등에 참여했죠.
한 걸쳐 있는 것만 많고 제대로 못해요.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에서 3년 보내고 뭐 좀 해보려는데 엠비 들어서며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죠.(웃음) 민주정권 때는 싸워도 앞으로 나가기 위한 거였는데, 엠비 때는 여태까지 쌓아 놓은 걸 지키기에 급급한 거죠.
고 사회활동은 물론 역사 대중화에 기여한 역사학자인데.
서 제3세계에서 어떤 가치가 생활어가 되는데 대략 한 세기가 필요하죠. 첫 세대는 번안, 다음 세대는 풀어먹고, 세번째는 되어야 자기 언어가 나와요. 우리는 한홍구를 통해 구어체화된 역사와 만난 거죠. 역사기술론적 변화가 일어난 거지. 일제 관변사학이 지배해온 ‘역사권력’에 진보적 사관으로 맞서 ‘역사시장’에서 승리한 거죠.
고 역사학자로서, 역사기술론에 관해 한마디. 역사란 무엇인가요?
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뿌리가 억지투성이죠. 그런 것들을 ‘아이스케키’ 하든지 그게 이렇게 된 거다 새로운 해석을 하는 역할을 해온 거죠. 한 10년쯤 하면서 역사책으로 어쨌거나 많이 팔렸어요. 좋은 시절에 <한겨레21>과 <한겨레> 만난 덕분이죠. 다 아는 말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인데, 얼마나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 말을 실천해왔는가. 앞으로 좀더 길게 깊게 정리해보려 합니다.
서 한국 역사학이 기본적으로 서지학(문헌고증학)인데, 까놓고 얘기하면 무덤 파먹고 사는 거야. 한홍구는 무덤이 아니라, 현대사학자가 아니라, 현재사학자죠. 현재를 파대는 거죠. 100년 전 문제를 오늘로 가져다 놓고 현재 문제로 치환해서 싸우게 한다는 거죠.
고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요?(웃음)
서 둘 다 몽니가 없는 듯해요. 바빠서 그런가?(웃음) 한 10년 남짓 놀아보자 한 건데, 둘이 대화하다 보면 상승하는 지점이 유쾌해요.
한 남들 안 하는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해요. 이 동네나 저쪽 문제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 같이 살다 보면 불편한 게 왜 없겠어요. 그러려니 하면서, 서로 이해타산 안 하고 살아가는 거지.
서 주머닛돈 쌈짓돈 곗돈 안 나누니 적성에 맞아요. 살림도 생각도 간이 맞고.(웃음)
필살기가 있었나? 본질을 꿰뚫었나?
고 ‘직설잔설’ 첫 회 첫 문장이 “필살기가 없는 직설은 객담일 뿐이다. 저잣거리 언어이되 본질을 꿰뚫어야 쓸 만한 직설이랄 수 있다”인데 필살기가 있었습니까?
서 그때, 말 잘못했네.(웃음)
한 아이고, 고 기자한테 필살기 맞고 끝나네.(웃음)
고 직설이 유쾌하고 살아있는 언어잖아요. 근데 정작 두 사람 보면 낄낄대다가도 넘 진지하고 비장한 측면이 있는데.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고나 할까? 어떨 땐 손발이 좀 오그라들더라고요.
한 ‘직설’을 만든 것 자체는 거룩한 거죠. 장례를 많이 치른 사람들로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죠.
서 80년대에 보니까 비장하기만 한 사람이 오래 못 가. 유쾌하게 싸운 사람이 오래가더라고.
한 ‘비장하기만 했던 놈들’이 지금 뉴라이트 하고 있잖아.
서 진보적 낙관주의란 적어도 유쾌한 거거든요.
한 그걸 잘 표현한 말이 ‘진 팀이 이길 때까지’야.
고 아쉬운 점도 많죠?
서 당면한 문제를 새로운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직설을 준비하는 동안 어느새 때가 지나가버리는 일이 몇 번 있었죠.
한 여성과 젊은 사람들을 많이 못 했죠. 쌍용차 노동자들 초대 못 한 거, 85호 크레인 올라가 김진숙 선수와 ‘고공 직설’ 날리지 못한 것도 아쉽고.
서 ‘직설’ 하는 동안 일어난 사건 중 ‘쥐20’에 징역 10월 구형한 거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표현 영역을 ‘총통의 문화적 자본’이라고 한 나치의 발상과 다를 게 없죠.
한 마지막으로 “누군가 바통을 받아다오”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우리는 형식 달리해 계속 떠들 것이고. 조금 지나면 이빨 빠진 엠비에게 삿대질하는 놈들 많아지겠지만.
서 잘 노는 게 잘 싸우는 거고. 잘 놀았다면 그뿐.
고 “아윌 비 백” 하셔야죠. 터미네이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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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설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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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고경태,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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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독재자들
말이란 칠 할이 타인의 얼굴에 맞아 침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그 침에 제 혀를 뻗어서 기꺼이 핥는 게 시다. 소설은 침을 묻혀가며 읽어야 역시 제맛이다. 그리고 노래란 귀로 씹는 껌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말은 짜증이나 기도다. 둘이 대거리하면 수다에 그치지만, 너·나·그 셋이 모여 주고받는 말은 세상을 바꾼다. 혁명적 언어는 광장에서 태어난다. 광장은 대중의 심장이자 어머니다. 말의 광장 <한겨레>에서 ‘직설’은 ‘눈으로 듣는 말’이고자 했다. 종이에서 말이 들리게 하고자 했다. 구어체다. 사회 의제를 저잣거리 말로 풀어내 장터와 대폿집과 지하철, 버스에서 되새김질할 수 있는 말이기를 바랐다. 말이 안줏감을 넘어서면 몸 안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한순간 화약처럼 폭발하는 법이다.
한 독자분이 ‘직설’을 일러 ‘금요일의 독재자들’이라고 했다. 먼저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다는 격려다. 미처 다 말하지 않은 그 행간에서 한홍구·서해성·고경태는 면을 장악한 일방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경고를 읽어냈다.
지식분자에게 말이란 칼이다. 말·글·칼은 그래서 하나다. 그 칼이 때로 무디고 쓸데없이 날카로웠을 줄도 안다. 유쾌한 진보, 쌀밥 같은, 밥상 같은 진보를 찾아 장안 고수들과 말로 겨루고 벼려내기를 쉰번 거듭했다. 칼을 내려놓고 그분들과 그 고수들이 내뿜은 장풍에 읍한다. 금요일 아침마다 나오는 긴 글을 읽어준 분들께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넙죽 엎드린다. 광고도 빼고 한 면을 통째로 내어준 <한겨레>의 배포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스페인 내전과 관련 있는 “이걸 용납하면, 다음에 당신 아이도 당한다”(If you tolerate this, your children will be next)라는 노래가 있다. ‘직설’을 노래로 옮기면 이와 다르지 않을 터이다. 홍세화 선생의 지난주 칼럼도 같은 취지였다. 작은 독재를 허용하면 큰 독재로 이어지는 법이다. 잠시 말을 접고 함께 듣기를 청한다. 귀로 씹는 껌을.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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