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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14 20:16 수정 : 2010.06.14 20:16

중국에서는 축구(蹴球)를 축국(蹴鞠)이라 한다. 가죽으로 만든 공을 발로 차며 노는 놀이란 뜻이다. 과장이 다소 심한 중국 사람들, 체육사 책에다 버젓이 축구의 기원을 전설 속 황제(黃帝)에다 갖다 붙여 놓는다.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축구가 있었다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축구의 출현을 약 2300년 전 전국시대로 본다. 당시 강국의 하나였던 산둥반도의 제나라의 수도 임치 사람들이 공차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나온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궁중 생활에 무료해하는 촌사람 아버지를 위해 수도인 장안성 동쪽에다 고향(장쑤성 패현) 풍읍을 모방한 신평이란 마을에다 전용구장까지 만들고 아버지의 고향 친구들을 불러 놀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축구의 역사도 만만치 않다. 고구려 사람들이 즐겨 공을 찼다는 축국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사람들은 축국을 ‘구슬(공)을 갖고 노는 게임’이란 뜻에서 ‘농주희’라고도 불렀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과 김춘추가 함께 ‘축국’했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다. 당시 김유신은 “일부러 춘추공의 옷을 밟아서 옷고름을 찢고는” 집으로 데려가 꿰매게 되었는데, 이 일로 춘추와 유신의 누이동생 아지가 눈이 맞아 결국 두 가문은 극적으로 결합하기에 이른다. 이후 두 사람은 삼국을 통합하는 주역으로 활약하게 되고, 아지의 뱃속에 들었던 아기는 삼국 통합을 마무리한 문무왕이 된다. 김유신의 고의적인 ‘태클’이 두 집안의 운명은 물론, 신라의 역사와 나아가서는 우리 역사를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 셈이다.

우리 축구가 모쪼록 갈라지고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엮어주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영수 중국 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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