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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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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팼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때린 손은 더 아프다. 야단쳤다든가, 혼낸 것이 아니다. 팼다. 아버지로서, 아니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형편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3인 아들의 일상의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다 내가 많이 흥분했던 모양이다. 때릴 듯, 내가 손을 치켜들자, 아들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키는 물론, 몸집이 나보다 훨씬 큰 아들에게 내가 힘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꼼짝하기 어려웠다. 당황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녀석은 슬그머니 손을 놓는다. 그 상황에서도 아들은 아버지인 내 체면을 지켜 준 것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이 회복될 수 없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미 졌다. 나도 알고, 아들도 안다. 나보다 조금 앞서 비슷한 경험을 한 내 친구 귀현이는 열 받은 나머지, 아들에게 ‘계급장 떼고 붙자’고 했단다. 느닷없이 웬 계급장(?),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자기만 팼단다. 지금도 이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너무 ‘쪽팔려’ 한다. (이 맥락에서는 ‘쪽팔리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나는 너무 괴롭다. 그러나 아들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낸다. 내게 이야기도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온다. 젠장, 승자의 여유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를 들이받게 되어 있다. 나같이 평범한 아버지를 들이받는데도 내 아들은 18년이 걸렸다. 뛰어난 아버지를 둔 아들은 더욱 힘들다. 죽을 때까지 아버지 그늘을 못 벗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로이트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갈등인 부자문제를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다. 아들은 아버지의 여자인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러나 힘센 아버지를 당할 재간이 없다. 아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아버지 밑에서 죽은 듯 지내든가, 아니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하든가, 둘 중 하나다. 아버지는 기존 질서에 대한 상징이다. 아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려면 기존 질서를 부정해야 한다. 아버지를 죽이는 상징적 살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성기를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거세불안’(castration anxiety)에 시달린다. 두려운 아들은 아버지의 가치와 도덕을 그대로 승계한다. 아버지의 세계를 이어받지만 아들의 새로운 세상은 없다. 자신의 세계를 열어가려면 아들은 어떤 방식이든 아버지를 치받아야 한다. 문명사적 딜레마다. 그래서 역사의 위대한 인물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이들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거나, 무책임하게 집을 나간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기도 한다. 심한 경우, 알을 깨고 태어나거나, 우물가에서 주워온다. 나는 내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려면 어떤 식으로든 나와 갈등해야 한다. 그러나 매번 이런 식이라면 난 너무 괴롭다. 요즘 차범근, 차두리 부자를 보면서, 프로이트식 갈등이론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보름달 빵’과 ‘베지밀’ 내기 축구시합을 한 이후, 내가 자발적으로 공을 차 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아들 차두리의 경기 장면을 해설하는 차두리 아버지, 차범근의 이야기는 넋을 놓고 들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차두리 아빠, 차범근 감독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들을 가진 사내들은 모두 ‘누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싶어 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일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축구공이다. 이들에겐들 어찌 갈등이 없었을까. 그러나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공유하는 부자에겐 갈등의 내용도, 그 해결 방식도 다른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내 아들이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나와 내 아들이 함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받아들이기 참 어렵지만 인정해야 한다. 자업자득이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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