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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30 19:21 수정 : 2012.04.30 19:21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고혹적인 모습 훔쳐보며
음탕한 말들을 마구 해댔는데
그 여인이 한국인이라니…

일본 교토 기온 인근의 고서점가를 함께 걷던 빡빡머리 사진작가 윤광준과 20년 전 겨우 시집 한권 쓴 게 전부인 ‘시인’ 김갑수는 중고음반가게를 보더니 갑자기 환장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가게의 모든 시디(CD)와 엘피(LP)를 뒤집었다 엎었다 한다. 투덜대는 내게 둘은 재즈의 역사를 설명해가며 자신들이 방금 구한 음반의 가치에 감격해했다.

고서점가에서 책을 뒤지면서는 일본의 우키요에와 인상파의 관계, 혹은 근대언어가 먼저 형성된 뒤에야 근대사회의 성립이 가능했던 일본의 모더니티에 관해 토론했다. 서양의 광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아하고 산뜻한 주말 시장을 지나면서는 서구를 흉내 내다가 더 서구적이 되어버린 일본의 옥시덴탈리즘의 기원에 관해 흥분해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에 혼자 지내며 시도 때도 없이 외롭다는 문자를 남발하는 나를 위문공연차 방문한 광준이형, 갑수형과 함께 보낸 지난 주말의 이야기다.

문화심리학자이며 나름 베스트셀러 작가, 사진작가 겸 오디오평론가, 시인이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우리 셋이 나누는 고담준론의 수준은 그 끝을 몰랐다. 그 대화를 녹음해서 풀어쓰기만 해도 바로 폼 나는 책이 될 듯했다. 교토의 뒷골목을 한없이 걷던 우리는 골목 어귀의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 바닥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특이한 카페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인에게 예민한 시인의 눈길이 자꾸 옆 테이블로 향했다.

묘한 분위기의 젊은 여인이 혼자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왜 이 찬란한 봄날 오후 혼자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까, 그 여인이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를 우리는 궁금해했다. 시인은 헤어스타일을 조금만 바꾸면 이영애 못지않은 고혹함이 있다고 했다. 사진작가는 흘끔흘끔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며 훌륭한 누드사진의 조건을 들먹였다. 나는 내 일본어 실력으로도 충분히 합석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리의 이야기는 고등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담배 훔쳐 피우며 나누는 음담패설 수준으로 곤두박질했다. 어차피 이 커피숍에는 우리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우리의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일본인들뿐이었다. 우리는 누가 더 과감한 에로틱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시합하듯 쏟아냈다. 우리의 상대역은 물론 그녀였다. 그 사이에도 시인은 틈틈이 그 여인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온갖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순간 옆 테이블의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카페 주인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뿔싸, 분명히 한국말이었다. 순간 얼음이 된 표정으로 일제히 카운터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주인은 자신이 한류 팬이라고 했다. 한국 손님들에게는 한국말로 인사한다고도 했다. 아, 옆 테이블의 그녀는 한국 사람이었다.

동시에 입을 가리고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카페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바로 복기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모더니티, 우키요에와 인상파, 재즈의 역사에 관한 폼 나는 이야기는 카페에 들어오기 전에 죄다 끝났다. 시인과 내가 주고받은 에로틱한 상상력은 채찍·촛농이 난무하는 사도마조히즘이었다. 음탕한 단어는 사진작가가 제일 많이 썼다. 그날 밤늦도록 우리는 기온의 선술집에서 그 민망함과 ‘쪽팔림’을 반복해 이야기하며 맥주잔을 들이켰다.

그들은 이제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방바닥을 뒹굴며 혼자 미친 듯 자꾸 웃는다. 행복한 주말이었다. 나이 들수록 민망함과 ‘쪽팔림’을 함께할 친구가 그리운 까닭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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