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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의 오늘 점심] 보양식으로 신분 상승한 추탕 |
추탕은 출세했다. 도발적인 표현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서울식 추탕은 조선시대 하층계급의 음식이었다. 조선의 어떤 요리서에도 추탕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꾸라지 요리에 관한 기록으로는 19세기 초에 나온 <난호어목지>에 시골사람들의 별미로 언급된 밋구리죽과 그 후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되어 있는 추두부탕(鰍豆腐湯)이 고작이다. 추두부탕은 두부와 미꾸라지를 함께 끓이면 미꾸라지가 열기를 피해 두부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그것을 지져서 해먹었다는 탕으로 성균관 인근에 살던 반인(泮人: 백정)들이 즐기던 이미(異味)라고 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추탕이 반가에서는 먹지 않았던 음식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추탕이 조선시대의 걸인조직인 꼭지들이 즐겨 먹던 꼭지탕에서 유래한다는 이규태의 설명은 그러한 추론에 확신을 갖게 한다. 거지들은 주로 청계천 다리 밑에 자리잡고 미꾸라지를 잡아서 끓인 탕을 팔기도 했다는데 그들이 다리 위로 올라와 일반인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식당영업을 시작하면서 추탕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4년에 간행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처음으로 추탕 조리법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무렵에는 추탕이 보편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서울의 유명 추탕집들이 대부분 그 무렵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도 이러한 추리를 뒷받침한다.
미꾸라지를 갈아 넣는 남도식 추어탕과 달리 추탕에는 미꾸라지가 통으로 들어가는데, 그런 관행도 걸인들이 손쉬운 조리법을 택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어림은 지나친 것일까. 서울 무교동의 용금옥은 근 80년을 한자리에서 지금은 보양식으로 신분이 달라진 추탕의 전통을 이어온 명가이다. 한양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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