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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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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 없으면 그 사회의 발전도 없다. 촛불시위와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의 교훈적 결론이다. 동의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촛불시위 당시의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그때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는 질타적 원인진단에 이르면 착잡하다. 반성의 주체가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에도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촛불집회 당시의 ‘주체적 나’가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버렸다는 느낌 때문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을 향한 반성 요구가 아니라 ‘당시 일부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일부 인사’들의 선동에 의해서 수백만명의 개념 없는 이들이 촛불을 들고 백일 넘게 밤거리를 배회했다는 상황인식이 전제된 부연설명이다. 한나라당 대변인은 “‘광우병 대란’은 대한민국 체제전복 집단이 기획하고, 인터넷이 음모의 도구로 이용되고, 야당까지 부화뇌동한 거대한 사기극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착잡한데 언제부터인가 ‘배후론 전문가’가 된 듯한 김동길씨는 강연을 통해 만담 수준의 배후론을 펼쳐 실소를 자아낸다. 자신은 촛불시위가 시작되자마자 ‘아 저건 뒤에 뭐가 있구나’ 확신했단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들 유모차 밀고 나와서 밤중에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배후가 있다고 지적할 경우 대부분 펄쩍 뛰는데 그게 바로 배후가 있다는 증거라는 해석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웃자고 한 만담에 죽자고 달려들자는 게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배후론은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 사고구조가 단순한 게 아닐까 되짚어보기보다 배후라는 외부 환경을 손쉽게 앞세우는 행위이다. 석가모니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일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미래의 최고권력보다 진짜 나를 찾는 일이 훨씬 가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이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위 계승을 노린 누군가의 음모나 배후론으로 이해하는 게 훨씬 빠르고 명쾌한 답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신앙에 가까운 확신으로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이 훗날 재앙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그 사업의 취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재의 시점에서 토건 마피아의 배후설을 들이대면 당사자인 이 대통령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내가 얼마나 역사적이고 전문적인 식견을 바탕으로 내린 의사결정인데 감히 나를 무뇌아 취급하는가. 일반 국민들의 마음도 그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나도 여러 번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서너 살 꼬마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고, 개념 찬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있는 옆자리에 앉아 환한 미소를 보태기도 했다. 몇 가지 과장된 정보 때문에 잠깐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것은 온전히 ‘주체적 나’의 판단이었다. 당시 그 많은 촛불이 거리를 뒤덮었던 것은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한 구체적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극소수 정책결정권자들이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먼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하는 결혼인데 당사자는 쏙 빼놓은 채 양가 어른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봉건적 혼례준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마음의 영역에서 차별받으면 인간은 누구나 분노한다. 거의 본능적이다. 대통령의 슬픔과 내 슬픔이 다른가. 대통령의 분노와 내 분노가 무엇이 다른가. 촛불시위 당시 거리에 100만개의 촛불이 있었다면 그건 100만개의 배후가 있었던 것이고, 10만명이 모여 목소리를 합했다면 10만개의 배후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각각의 마음이 바로 배후다. 모든 인간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필요에 의해 정치공학적인 배후론을 습관적으로 들먹이다 보면 반드시 재앙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촛불시위는 그런 마음의 법칙을 알려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편찬중이라는 촛불백서에 ‘모든 국민에겐 각자의 마음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꼭 기록해 주기 바란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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