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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29 18:48 수정 : 2010.09.29 18:48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고산병은 평지 주민이 높은 산에 올랐을 때 산소부족으로 신체적 고통을 겪는 질병이다. 두통이나 환각, 경련, 호흡곤란은 기본이고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고산족들은 같은 환경에서도 끄떡없다. 그들로서는 평지 주민들이 왜 숨을 헐떡이는지, 왜 갑자기 의식을 잃는지 의아할 수 있다. 일부 고산족들은 수천년 전부터 고지대에 정착해 살아오면서 저산소 환경에 견딜 수 있는 특유의 신체적 특징이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고산족들의 신체적 감각으로는 평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외교통상부 특채 파동 이후 사회 곳곳에서 고구마줄기처럼 딸려 나오는 고위 공직자들의 인사 특혜 행태를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에도 ‘특혜고산족’이 있다는 소설 같은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소위 ‘있는 집안’으로 별칭되는 특혜고산족들은 오랜 기간 끼리끼리 뭉쳐서 특혜에 젖어 살다 보니 특혜유전자가 생겨나 외부의 반응에 전혀 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일반 정부부처 공무원들은 출신학교나 지역별로 뭉치기도 하는데 외통부에서 가장 강력한 빽은 외통부 고위인사의 친인척, 단 하나란다.

발단은 외통부지만 중앙정부, 지방정부, 산하기관, 의회, 방계기관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특혜고산족들의 제 자식 끌어주기 작태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한다. 엊그제 뉴스엔 4급 이상 지자체 고위공무원을 부모로 둔 공익근무요원 82명 중 19명이 아버지와 같은 기관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다음날 뉴스엔 교육감의 딸이 교원 특채 때 맞춤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끝도 없다. 그들의 세계에선 인사 특혜가 일상적인 일이다. 특혜라는 의식조차 없다.

장관 딸의 맞춤특혜를 영화 <대부>로 패러디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한 한 영상물은 특혜고산족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반영한다. “없는 집마냥 애 고시공부 시킬 것도 아니고… 아빠가 되어 가지고 장관 두 번 해먹을 것도 아니고….” 없는 집 애들처럼 고생시키지 말고 빨리 챙겨주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일부 계층에서 가족 중에 군필자가 있으면 없는 집처럼 보일까봐 쉬쉬한다는 세간의 속설이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다.

특혜고산족이란 제 자식은 햇빛 가득한 곳에 뛰놀게 하면서도 애초에 감옥에서 태어난 아기에게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세상이란 게 원래 이렇단다. 그 안에서 착하고 열심히 살거라. 너의 운명이니까”라고 말하는 부류들이다. 악명 높은 신분제도의 상징인 카스트제도의 세뇌 논리와 다르지 않다. 카스트제도를 유지하는 핵심은 업과 의무이다. 전생의 악업 때문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불평하지 말고 내세에는 좀더 나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모든 권리는 내가 갖고 모든 책임과 의무는 네가 맡아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 식의 특혜고산족들이 활개치는 사회는 구성원을 병들게 한다. 요즘 직장인의 25%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단다. 본인의 능력과 전혀 상관없는 일임에도 외모가 자본이 되는 시대를 넘어 부모가 자본이 되는 시대로 내달리는 느낌이다. 그런 상황에서 죽을힘을 다해 각개약진해야 그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보존할 것 같은 불안감에 대다수의 평지인들은 상식마저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런 때 특혜고산족들이 부르짖는 공정한 사회는 웃으면서 칼로 찌르는 부조리극 속의 킬러와 똑같다.

일부 계층의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적 위치가 본인만의 피나는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제 자식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따위 생각들에 사로잡혀 본인들이 특혜고산족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그곳은 짐승의 집단과 다르지 않다. 어른의 사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짐승의 사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정도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사회라면…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mind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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