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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0.20 19:58 수정 : 2010.10.20 19:58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는 드라마를 보다가 한 대목에서 찡했다. 해외에서 취재하다 반군에게 살해당한 기자의 아내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정부에 분노한다. 그때 대통령이 그녀를 찾아와 건네는 진심 어린 한마디. “죄송하고 면목없습니다.” 감동을 배가시키기 위한 드라마적 설정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나는 그 짧은 한마디에 울컥했을까. 진심의 힘이 느껴져서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공조직이나 공인으로부터 그런 진심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목말라 그랬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500원짜리 동전을 그리라고 하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실제 동전의 크기보다 크게 그린다. 결핍감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지난주, 한때 대통령을 지냈던 전두환씨가 모교를 방문해서 벌였던 일련의 작태는 왜 많은 국민들이 진심 결핍감에 시달리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봉황 문양이 새겨진 자리에 앉아 운동장에 엎드려 큰절하는 동문 후배들을 바라보는 전씨의 모습은 괴기스럽다. 전두환각하배 골프대회를 치르고, 재산압류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서 받은 강연료 300만원으로 추징 시효를 연장하는 꼼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지경을 넘어 보는 이까지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행사를 주관한 일부 관련자들은 동문 선배에 대한 후배들의 성의에 왜 다른 사람들이 왈가불가하느냐고 언짢아한다. 내부자 시선으로 보자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보인 행태는 일개 지역 토호가 가족 모임에서 벌인 일이라고 해도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단순무지함과 배타성이 지극히 조폭스럽다. 전씨와 추종자들의 행동은 한나 아렌트가 정의한 무사유에 가깝다. 내 행동이 남에게 어떤 고통이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해서 누군가를 깊은 분노와 고통에 빠지게 하고도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생각 없음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매주 전두환씨를 만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무사유의 흔적과 만난다. 지난 2년간 월요일 저녁마다 봉은사에서 진행되는 고문치유모임의 집단상담을 통해서다. 5기까지 진행된 이 모임의 참여자들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고문에 의해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삶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슴에 서걱거리는 모래와 묵직한 바윗덩어리 외에는 남은 게 없는 사람들이다. 살면서 가장 편안했던 순간이 언제인지 묻는 질문에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십일간 고문을 당하다가 교도소로 옮겨졌을 때였다고 말하는 사람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이제 더는 고문을 안 당해도 되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을 가장 달게 기억한다는 말을 듣다 보면 가슴이 타들어 간다. 하지만 ‘밤마다 피를 토하며 울다 지쳐 제 피를 되마시며 우는 풀꾹새’처럼 세상 어디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던 아픔을 풀어헤쳐 놓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조금씩 일어서고 있다.

전씨와 추종자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가지고 언제까지 눈 흘길 거냐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들이 진심을 다해 진실과 대면하지 않는 한 어떤 이들에게 고문의 고통, 고통의 고문은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고문치유모임 참석자 중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이들이 자신의 보상금 일부를 내놓아 만든 재단이 있다. ‘진실의 힘’이다. 고문피해 당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또다른 고문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만든 재단으로는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다. 자신들처럼 억울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손 내밀어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진심이 이룬 기적이다.

‘진실의 힘’ 재단을 보면서 나는 진심과 진실의 힘은 지옥 경험조차도 치유한다는 치유의 법칙을 초심자처럼 깨닫는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의 분노와 상처는 진실의 힘으로 승화될 수 있다. 진심이 있다면.

자기의 허물과 그 허물의 태산 같은 파장에 대해선 끔찍할 정도로 무지하면서도 자신에게 분노하는 이들에겐 이미 지난 과거 타령만 하면 어쩌느냐고 훈계하는 ‘전두환’ 같은 무사유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mind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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