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10.26 17:25 수정 : 2006.10.26 17:25

박재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애니메이션. 전 한겨레 만평 화백


우리 할배

언제나 날 지게에 태우고 다니며 저건 감나무다 저건 대추나무다 가르쳐 주던 우리 할배, 내가 ‘콩찍자 방아 찍자’ 해달라 하면 콩매다가도 드러누워 얼러 주시던 우리 할배는 1898년에 태어 났다. 할배의 아버지인 우리 증조부는 너무 살기 어려워 울진의 어느 깊은 산골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할배가 갓난 아기 때 증조할머니가 젖이 안나와 아기가 많이 울자, 굶주린 호랑이가 매일 주위를 돌며 아기를 달라고 울어댔다.

못견딘 증조부가 아기 던져 줘버리라고 하자 증조모가 필사적으로 말려서 살아났는데 울진에서 났다고 이름이 울봉이다. 어려서 부터 계속 형편이 어려워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돈벌이 하러 지게에 명주천을 넣고는 만주로 갔는데 여기는 아니다 싶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갔다. 도쿄 부두에서 짐나르는 노동을 했는데 힘이 좋아 남이 한짐 질 때 두짐을 져서 어깨 한쪽이 찌부러 졌다. 그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조선사람들을 학살할 때 평소 성실하다고 잘 보아 온 하숙집 주인이 숨겨줘 살아 났다.

돈을 많이 벌어 한국에 돌아 온 할배는 유망한 청년으로 소문이 나서 울산 시내의 부잣집 손녀와 결혼을 해서 논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 우리 할배가 저기 앉아 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재동의 스케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