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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02 21:54 수정 : 2010.06.06 15:17

졸업을 1년 앞둔 상황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싶어요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졸업을 1년 앞둔 상황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싶어요

Q 졸업을 1년 남겨둔 상황에서 더이상 학교생활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한심한 학생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제게 주어진 일들에 집중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미대 디자인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왔지만, 디자인과는 그림보다는 기획과 아이디어가 좀더 중점이 되는 학과로, 스트레스가 심한 편입니다.) 과제를 하려고 잡으면 어느새 딴짓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매일 밤도 새우는데 정작 한 일은 없는, 그렇다고 아예 작정하고 제가 하고 싶은 다른 작업을 하려고 해도 과제가 마음에 걸려서 이도 저도 안 되는, 그런 상태가 반복됩니다. 집중을 1시간도 못하는 것 같아요. 과제를 하지 않아서 받는 낮은 점수에도 별로 관심이 없고 설렁설렁 간신히 해내고 있는 수준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디자인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끌어온 것이 벌써 3년째입니다.

차라리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못하는 인간이라고, 차라리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쏟자고 결심하고 싶지만 졸업이라는 가장 큰 과제가 자꾸 저를 괴롭힙니다. 대학졸업에서 낙오되는 페널티와 3년 동안 낸 등록금,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미칠 것만 같아요.

A 자, 들어봐라. 소설을 쓰는 사람 중에 S선생이라는 ‘아조’ 훌륭한 분이 계시다. 이분은 소설을 쓰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 등단한 분이기도 한데, 이 양반께서 시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시기는 바로 법과대학에 재학중이던 때였다. 그림이 벌써 나오지 않는가? 시골 고향집에선 우리 아들이 법대에 진학했으니 이제 곧 고시 패스하고 마을회관에 플래카드 걸겠구나, 달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은 법전 따위는 내팽개치고 시집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한숨만 절로 푹푹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한데, 그 시기, 아들은 아들대로 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담배 연기만 팍팍 내뿜고 있었다. 속성으로 시인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한 선지자가 나타나 아들에게 이르길 ‘소리꾼은 목에서 피가 나고 온몸이 부으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똥물을 먹는다’고 일러준다. 똥물이라? 아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민했으나, 얼마 후 다가온 중간고사 준비로 행정법과 국제사법, 형사소송법 따위를 읽기 시작하다가, 바로 그것이 선지자가 말한 ‘똥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대에 걸친 실용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똥물’. 시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똥물’. S선생은 그 똥물을 마신 다음,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자자, 그러니까 오늘의 핵심도 바로 이 ‘똥물’에 있는 것이다.

상황을 이리저리 판단해보면, 적성과 맞지 않는 전공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딴짓’과 ‘죄송함’이라는 단어가 계속 걸리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친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의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케이스라는 것. 한마디로 자신 안에 자신보다 더 큰 ‘타인’을 키우고 있는 셈, 되겠다. 그러니 자연,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은 ‘딴짓’으로, 자신의 결정은 ‘죄송함’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렇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닌 거 같다. 온전히 ‘타인의 시선’에만 휘둘리고 있으면, 갈팡질팡 스트레스를 받는 일조차 없을 테니까. 자아를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운 일인가? 지금 이 친구에게 필요한 건 추상적인 ‘자아찾기’ 운운이 아니라, 당장의 구체적인 현실일 것이다. 그래서 저 위에 ‘똥물’ 얘기를 길게 한 것이다.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미안하지만, 단정적으로 얘기하겠다. 절대로 학교 그만두지 마라. 스펙이나 부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다. 목에서 피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만두면, 그게 버릇이 될까 걱정돼서 하는 소리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졸업한 뒤에 ‘딴짓’해라. 그래야 ‘딴짓’이 ‘자기 일’이 될 수 있다. 어쨌든 ‘디자인과’도 당신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삭신 쑤시게 겪어봐야, 다음의 선택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꾸 남의 조언에 기댈 생각 따위도 하지 마라. 타인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뭘, 얼마나,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기대는 것도 습관이다. 그저 스스로 ‘똥물’을 마시고 자신이 소화시키는, 역한 과정을 견디는 수밖에.

한 가지 더. 보험회사들은 중간에 계약해지 하는 친구들을 제일 반긴다. 그 친구들이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해주는 고객이기 때문이다. 그냥, 참고만 해라.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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