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에 지쳐 ‘꿈’을 이용하지 않나요?
|
[매거진 esc]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Q 서른 앞두고 밴드드러머의 미련이 꿈틀거려요
연예인 매니저를 하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입니다. 이 일을 한 지 벌써 4년째인데 쉬는 날도 없이 계속 일만 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재미삼아, 그 뒤엔 적응돼서, 지금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힘들어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원래 꿈은 밴드 드러머입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거리공연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꿈을 포기하고 매니저 일을 시작한 건 제대 뒤입니다.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 싶어서인지 밴드에 대한 미련이 꿈틀거립니다. 이제 곧 서른인데 매니저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들고요.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이 됩니다. 밴드로 먹고살기 힘든 건 알지만 미루다 보면 영영 멀어지는 꿈이 될 거잖아요. 하지만 좋아서 한 뒤엔 어쩔 건데 하는 불안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서랍 속에 넣어둔 사표를 제출하고 자신있게 새 세상으로 향한 문을 열고 나오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그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아요. 도화선에 누가 불을 붙이지 않으면 터지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장기적인 비전을 못 찾았으나 안정적인 일과 고정수입을 포기하지 못해서일까요. 마음은 이미 콩밭에 있는데 밭매러 나가지지가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A 자, 잘 들어봐라. 알고 지내는 후배 중 인디 쪽에선 나름 알아주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다. 벌써 10년 가까이 홍대 쪽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밴드인데, 음반도 석 장이나 냈고, 얼마 전엔 일본의 알아주는 레이블사와 계약도 했다고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와, 그럼 이제 너 롯데마트에서 박스 나르기 안 해도 되는 거냐?’였다. 이게 무슨 말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을 터. 그럼 곧장 다음 사례 하나 더. 역시 알고 지내는 작가 중 낮에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쓰는, 말하자면 ‘투잡’을 기본원칙으로 꽤 오랫동안 생활해온 선배가 한 분 계신데,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이 양반은 술만 마시면 ‘내가 전업으로 소설만 쓰면 이것들을 다…’ 운운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도 꽤 여러 번 들은 소리이니 선배의 와이프야 말하면 무엇하랴. 해서, 선배의 와이프가 도화선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전업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게 웬걸? 선배는 전업 생활 2년 동안 소설은 한 편도 못 쓰고, 사보나 관공서 홍보물에 콩트와 수필만 잔뜩 쓰다가 다시 학교로, 기간제 교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다시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말씀. 이 또한 이런저런 해석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아들었을 터.
핵심은 ‘직업’이란 말과, ‘꿈’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계’라는 의미와, ‘바람’이라는 어휘를 각각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지쳐서, 그 일에 진력나서, 어쩌면 그 알리바이로서 ‘꿈’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화선을 찾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상담 메일을 보낸 것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매니저’와 ‘밴드 드러머’는 같은 반열에서 선택을 고심할 비교 대상이 결코 못 된다.(알리바이를 찾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 중 하나가 ‘객관성의 결여’이다.) ‘A’를 대체할 ‘B’가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당신이 4년 가까이 매니저 생활을 할 동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죽어라고 드럼만 두들긴 친구들이 너무 많다. 그 친구들은 대개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거나, 선택 같은 것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다. 그런 경우에만 겨우 ‘꿈’과 ‘직업’이 하나되곤 한다. 이건 뭐 선택 자체가, 비교 자체가 봉쇄된 케이스들이니까.
그러니 정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괴로우면 다른 직업을 알아봐라. ‘꿈’을 위해서 사표 낸다고 하면, 당장은 폼 나겠지만, 그 뒤에 남는 건 ‘꿈’에 대한 원망뿐이다. 그 원망을 또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시는가?
|
이기호의 독고다이 상담실
|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