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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11 17:31 수정 : 2010.08.11 17:31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지난가을, P는 남편에게서 느닷없는 꽃다발과 향수 선물을 받았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조차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남편이 웬일로 아끼던 와인을 따고 손수 안주를 만들더니 조용히 P를 불러 앉혔다. 그러곤 대뜸 잔에 든 술을 원샷하더니 P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날, 승진 소식이나 로또 당첨 등의 희소식을 기대했던 P는 남편에게서 뜻밖의 비보를 전해 들었다. P의 남편은 동료로부터 입수한 고급정보를 믿고 자동차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카드빚까지 내어 주식에 투자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의 주식은 불과 석 달 만에 반 토막이 났고, 종래엔 꽃다발과 향수값 정도만 남기고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래 놓고선 빚 감당이 되지 않자, 속죄의 선물을 사들고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바란 거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먹이 운다는 말을 실감한 P는 감아쥔 손을 바들바들 떨다 운동복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와 오빠가 사는 대구로 내려갔다. 그녀가 화가 난 건 주식으로 날린 돈이 아까워서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 거금을 투자하는 일에 아내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은 남편의 독선이 야속했던 게 진짜 이유라고 했다. 끝내 화를 풀지 못한 P가 이혼까지 선언하자, 보다 못한 오빠가 매제에게 전화를 걸어 화해를 주선했다. 그의 남편은 시르죽은 어깨로 다시는 주식 투자를 않겠다는 각서로 용서를 구했지만 P가 진정 원했던 건 다시는 아내와 상의 없이 대소사를 결정하지 않겠다는 진심어린 약속이었다고 했다. ‘남자들은 넥타이 하나도 저 혼자 고르지 못하면서 그런 어마무지한 일엔 왜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는 걸까?’

서울로 돌아와 적금을 해지해 빚잔치를 치르고 난 P가 한숨과 함께 뱉어낸 말이었다. 신뢰를 잃은 부부는 더는 미래를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보험금 수령인이 배우자인 보험들을 모조리 해지하고, 일 년째 함께 다니던 불임클리닉도 발길을 끊었다. 지난가을, P의 남편이 맥없이 탕진한 건, 오 년 만기 적금과 삼 년 탄 자동차, 그리고 육 년을 함께한 아내의 신뢰였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누군가 믿음을 잃었다면, 그에게 의지하고 살 수 있는 무엇이 남았겠는가?’ P의 남편에겐 잔인하지만 확고한 진실일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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