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러브
나 역시 길거나 짧거나 의미 없는 연애를 줄기차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의 직업이나 외모, 성격은 가지각색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주로 ‘비밀스런 연애’를 해왔다. 이유는 다양했다. 보수적인 직장에서 만난 동료, 친한 친구의 오빠, 거래처 직원, 동호회 연하남 등등. 비밀스런 연애란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주말이면 상사와 친구와 동료들의 눈을 피해 변두리의 허름한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손님 뜸한 동시상영관에서 영화를 봐야 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낄 때도 주변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없나부터 살펴야 했고, 공적인 자리에서 말실수를 하게 될까봐 끝내 ‘대리님’이라 부르다 헤어진 사람도 있었다. 불편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그 은밀한 관계를 내심 즐겼던 것도 같다. 회식 자리에서 탁자 밑으로 꼼지락거리며 손길을 주고받거나,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그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 책장이나 침대를 염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나 비밀과 연기는 새어나가기 마련이었다. 언제 결혼할 거냐고 천연스럽게 묻는 동료, 미니홈피 방명록에 ‘우리 오빠 핸드폰 1번이 너더라’ 부루퉁하게 글을 남긴 친구, ‘어제 광화문에서 거래처 ○○씨가 지영씨랑 꼭 닮은 여자하고 걸어가는 걸 봤어’ 하며 이죽거리는 직장상사. 그때마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죽어도 아니라고 우겨댔다.비밀스런 연애는 관계가 탄로 나면 시들해진다. 죽어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놨으니 뻔뻔스럽게 연애를 이어가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만남이 그랬듯, 헤어짐도 비밀스러운 연애였다.
어느 날 내 한심스러운 꼬락서니를 말없이 지켜보던 선배가 술집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대개의 비밀은 숨길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야.’ 첫말을 뗀 선배가 소주잔을 꺾으며 심상한 어조로 나를 나무랐다. ‘사랑이 창피하냐? 그럼 창피한 짓을 왜 해?’ 당시엔 발끈 화를 내며 반박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선배의 말이 옳았다. 나는 비밀을 덮기 위한 거짓말로 사랑의 가치를 끌어내렸다. 그걸 괴로워한다는 건 악어의 눈물이었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므로 하찮은 비밀이 되어선 안 된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걸 깨달았지만, 이젠 쓸데가 없어졌다는 게 아쉽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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