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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2.17 10:32 수정 : 2011.02.17 10:32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하이고, 4층 여자는 갓난아기 키우면서 손톱이 마귀할멈이야. 예방접종 하러 간다면서 볼꼴사납게 매니큐어까지 칠했더라니까.”

나만 보면 입이 바빠지는 이웃이 있다. 그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수다쟁이다. 작년에 연달아 남매를 출가시킨 그녀는 무료한 낮이면 아파트 1층 현관 안쪽에 작은 평상을 차려놓고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취미다. 그러곤 찐 감자나 귤, 월간지 등을 미끼로 인사 건네는 이웃을 주저앉혀 놓고 동네의 크고 작은 소문들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열을 올린다. 재활용 분리수거일을 번번이 어기는 2층 여자, 술만 취하면 골목에 노상방뇨를 하는 5층 남자, 툭하면 늦잠을 자고 손자 유치원 등원시간을 놓치는 3층 할머니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이웃은 청자인 나와 얼굴 마주치기 힘든 맞벌이 부부 몇뿐이다. 물론 청자가 누구냐에 따라 등장인물은 달라질 테니 그리 고맙지도 않다.

한 친구도 비슷한 이웃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자취를 하는 그는 밑반찬을 들고 찾아온 어머니한테서 당장 이삿짐을 싸라는 불호령을 들었다. 이유인즉, 집주인 여자가 어머니에게 그 집 딸이 수시로 남자를 자취방에 불러들이니 곧 국수 얻어먹을 일이 생긴 것이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주인 말과 달리 친구는 딱 한번을 제외하곤 남자를 집에 불러들인 기억이 없다. 그것도 급성간염으로 입원했다 퇴원하던 날, 집 근처에 살던 사촌동생이 그 ‘남자’였다. 올봄이면 전세 계약이 끝나는 그 친구는 요즘 방이 허름하더라도 집주인과 마주치지 않는 독립구조의 전세방을 구하느라 바쁘다.

오늘 4층 여자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티셔츠 앞자락에 분유 자국이 어룽진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음식물쓰레기봉투를 든 그녀의 손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그녀의 눈길이 거의 유니폼화되어버린 내 추레한 운동복을 더듬는 것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몇초 후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명 연예인이나 거물 정치인, 스포츠 스타도 아니었지만 억지로 지어낸 게 틀림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옷매무시를 고치며 수다쟁이 이웃이 기다리는 현관을 향해 피곤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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