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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7 11:30 수정 : 2011.03.17 11:30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요즘 한 전기밥솥 시에프(CF)가 유난히 눈에 띈다. 밥솥을 개비한 게 지난해 여름이니 새 밥솥이 탐나서는 아니고, 시에프 모델이 현빈이나 원빈 같은 미남배우도 아니니 미인계에 혹한 것도 아니다. ‘밥 한번 먹자!’라는 카피가 뜨끔해서다. 그렇다, 나는 ‘밥 한번 먹자’를 오남용하는 현대인 중 한명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우리는 형식적인 안부와 결혼 여부 등을 묻곤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그러곤 시답잖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한 뒤 당연한 절차인 양 ‘언제 밥 한번 먹자’며 황급히 어색한 만남을 매듭짓는다. 요즘 나는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멘트를 끊었다. 지난해 이맘때,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 때문이다.

학창 시절 그녀와 나는 회수권 살 돈을 모아 만화책을 사고, 매일 한 시간 거리의 학교를 손잡고 걸어 다니며 천계영과 황미나, 원수연 중 누구의 작품이 더 애간장을 녹이는지 설전을 벌이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우리는 주말에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아쉬워 일요일이면 시험공부를 핑계로 독서실에서 만나 캔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어른 흉내를 내고, 방학이면 짐을 싸 들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 며칠씩 더부살이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유치하지만 그때 우리는 가느다란 실반지 한쌍을 나눠 낀 다음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걸 빼놓지 않기로 약속하며 우정을 맹세했다. 그러나 친구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모가 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렸다.

다시 만난 친구는 미국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다 결혼했고 지금은 청담동에 작은 편집매장을 운영한다고 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요즘의 근황을 전한 뒤 어디 편하게 앉아 차라도 마실 곳이 없나 주변을 탐색했다. 그러나 친구는 연방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언제 밥 한번 먹자, 얘’ 하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새끼손가락도 내 새끼손가락도 휑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 나는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한때 사랑하였으나, 지금은 까맣게 잊어버린 소중한 사람들과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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