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4.28 10:11
수정 : 2011.04.28 10:11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지난겨울 싱크대 배수관이 막혀 때아닌 물난리를 겪었다. 곰국을 끓인 뒤 둥둥 떠오른 기름을 아무 생각 없이 하수구로 흘려보낸 게 말썽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얻어낸 갖가지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하나같이 실패했다. 외려 성공을 맹신하고 수돗물을 콸콸 틀었다 설거지물이 철철 넘쳐흘러 큰맘 먹고 시공한 원목마루가 들떠 오르기까지 했다. 돈 몇 푼 아끼자고 벌인 일인데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녹초가 된 몸으로 묵은 생활정보지를 뒤져 전문시공업체에 전화를 걸었지만 토요일인데다 한파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라 대부분의 가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행히 마지막 한 곳에서 출장 올 수 있단 대답을 듣고, 나는 비용도 묻지 않고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한참 만에야 공구가 잔뜩 든 가방을 옆구리에 낀 초로의 아저씨가 벨을 눌렀다. 가뜩이나 거리도 먼데 도로가 눈으로 덮여 오는 길이 수월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구정물이 찰랑거리는 싱크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내게 커다란 세숫대야를 준비하라며 소매를 걷었다. 아저씨는 세숫대야를 싱크대 아래 배수관 밑에 바짝 가져다 놓고 앵무새 입처럼 생긴 공구로 이음 부분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크대와 하수구를 잇던 배수관이 쑥 빠지며 세숫대야 안으로 구정물이 시원스럽게 쏟아졌다. 그는 끈적끈적한 노폐물로 꽉 막힌 배수관을 깨끗이 씻어 다시 끼워 넣고 수돗물을 틀어 잘 내려간 걸 확인하곤 공구를 챙겼다. 아저씨에게 출장비를 묻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고작 10분 노동의 대가로 5만원이란 돈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어 지갑을 열던 손이 멈칫하고 얼굴이 굳었다.
“요즘 사람들 참 희한하지요. 막힌 거 빨리 뚫어주면 내가 좋나, 주인네가 좋죠. 근데 왜 빨리 뚫어주면 돈 아까워하고 끙끙대는 척 천천히 뚫어주면 그제야 고생했단 말이 나오고 지갑이 열리는지 몰라요.”
아저씨의 능청에 얼굴이 화끈해진 나는 얼른 요구한 돈을 꺼냈다. 돌이켜보면 내가 건넨 돈 5만원은 내 부주의가 아니었으면 온당히 누릴 수 있었던 토요일 오후의 평화와 작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이지, 아저씨의 수고를 환산한, 어쩌면 꽤 약소한 출장비였는지 모른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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