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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청어 과메기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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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예종석의 신도문대작 | 청어 과메기
조선 초기의 기인 남사고가 그 지형을 호랑이 꼬리에 비유했던 구룡포 일대에 과메기가 한창이다. 과메기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말린 청어를 뜻하는 관목(貫目)이란 이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관목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린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이 ‘관메기’가 되었다 과메기로 변한 것이다. 1960년대의 기록만 보더라도 관메기란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던 것이 어느새 과메기가 된 것을 보면 말의 빠른 변화를 절감한다. 과메기는 원래 청어를 말려 만들었으나 60년대 말 청어가 자취를 감추면서 꽁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청어가 다시 등장하여 적은 양이지만 다행히 청어 과메기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과메기는 갓 잡은 청어나 꽁치를 냉동 상태로 보관하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바닷가에 내걸어 차가운 해풍을 맞혀서 냉동과 해동을 반복시키며 수분 함유량이 40% 정도 될 때까지 말려 만든다. 청어는 기름기가 많고 몸집도 커서 과메기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꽁치보다 길어 업자들이 생산을 기피하는 것이 흠이지만, 청어 과메기의 구수한 맛은 꽁치 과메기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명물기략>은 청어를 값싸고 맛이 있어 한양의 가난한 선비들이 잘 먹는 물고기라고 밝히고 있으며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란 의미의 ‘비유어’(肥儒魚)로 명명하고 있다. 서울사람들이 청어를 ‘비웃’이라고 하는 것은 이 비유어란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긴 조선 중기의 청백리 안현이 편찬한 <소수서원선록>에는 부산 근방에서 청어를 잡아 말린 과메기를 육로로 200㎞나 떨어진 경상북도 풍기의 소수서원까지 운반했으며 당시 유생 한 사람이 하루에 청어 네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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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석의 신도문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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