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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09 19:12 수정 : 2010.06.01 15:05

웰컴 청어 과메기 귀환

[매거진 esc] 예종석의 신도문대작 | 청어 과메기





조선 초기의 기인 남사고가 그 지형을 호랑이 꼬리에 비유했던 구룡포 일대에 과메기가 한창이다. 과메기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말린 청어를 뜻하는 관목(貫目)이란 이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관목은 청어의 눈을 꼬챙이로 꿰어 말린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이 ‘관메기’가 되었다 과메기로 변한 것이다. 1960년대의 기록만 보더라도 관메기란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던 것이 어느새 과메기가 된 것을 보면 말의 빠른 변화를 절감한다.

과메기는 원래 청어를 말려 만들었으나 60년대 말 청어가 자취를 감추면서 꽁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청어가 다시 등장하여 적은 양이지만 다행히 청어 과메기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과메기는 갓 잡은 청어나 꽁치를 냉동 상태로 보관하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바닷가에 내걸어 차가운 해풍을 맞혀서 냉동과 해동을 반복시키며 수분 함유량이 40% 정도 될 때까지 말려 만든다. 청어는 기름기가 많고 몸집도 커서 과메기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꽁치보다 길어 업자들이 생산을 기피하는 것이 흠이지만, 청어 과메기의 구수한 맛은 꽁치 과메기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명물기략>은 청어를 값싸고 맛이 있어 한양의 가난한 선비들이 잘 먹는 물고기라고 밝히고 있으며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란 의미의 ‘비유어’(肥儒魚)로 명명하고 있다. 서울사람들이 청어를 ‘비웃’이라고 하는 것은 이 비유어란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긴 조선 중기의 청백리 안현이 편찬한 <소수서원선록>에는 부산 근방에서 청어를 잡아 말린 과메기를 육로로 200㎞나 떨어진 경상북도 풍기의 소수서원까지 운반했으며 당시 유생 한 사람이 하루에 청어 네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예종석의 신도문대작
요즘은 단순하게 과메기를 미역이나 김에 싸먹는 정도지만 옛날에는 오히려 더욱 다양하게 해먹었던 모양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청어를 훈연해서 만드는 연관목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증보산림경제>에는 과메기로 지짐이를 해먹으면 맛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소설가 김동리는 “과메기를 불에 대강 구워 칼로 그슬린 비늘을 쏙쏙 긁어 버리고 쭉쭉 찢어 먹으면 술안주로서 더없이 좋은 맛”이라고 했으며 “과메기를 칼로 토막 내어 냉이와 쑥과 콩나물 따위를 섞어 죽을 쑤어 놓으면 이것이 또한 진미”라고도 했다. 미식가로 유명했던 언론인 심련섭은 과메기를 넣고 끓인 쑥국을 봄에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기도 했다. 청어 과메기는 구룡포의 어객수산(054-284-7139)에서 구할 수 있다. 요즘은 과메기의 진수라 할 수 있는 ‘통마리’를 따뜻한 날씨와 소요 시간 때문에 구경하기 힘들고 배를 갈라 말린 ‘배지기’밖에 없지만, 그래도 청어 과메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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