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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개를 겨우 넘으면 또 고개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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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④
청주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원주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습니다. 지금은 승용차로 두 시간 반 정도면 가는 길이지만 옛날에는 대여섯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버스의 창틈이나 환풍구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발은 꽁꽁 얼어붙곤 했습니다. 증평, 음성, 충주를 지나 소태재를 넘으면 양안치라는 고개가 있습니다. 그 고개를 넘어야 원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그 고개를 넘어 아버지가 있는 원주로 갔다가 그 고개를 넘어 다시 청주로 오곤 했는데 겨울에 양안치 고개를 넘던 기억이 강한 이미지로 남아 지워지지 않습니다. 양안치는 적수공권으로 고향 떠난 아버지 찾아 열몇 살 어린 나이에 내가 혼자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며 처음 만난 고개였다 백마령 넘고 목행과 목계 지날 때까지도 겨울 들녘과 나루터 감싸 안고 돌아 흐르는 강물이 아름다워 참을 만했는데 소태재 넘으면서 온몸을 조여 오는 바람에 몸이 덜커덕덜커덕 소리를 내며 떨렸다 돌멩이를 만지고 있는 듯 딱딱하게 얼어 가는 발 발이 시려 발가락 꼼지락거릴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 양안치를 넘은 것이 내 인생에 거센 바람 몰아치는 많은 고개가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는 첫여행이란 걸 그땐 몰랐다 어렵게 고개를 넘고 나면 또 고개를 만나고 그 고개 다 넘어서 만나는 것 또한 낯설고 차가운 풍경 경계의 눈초리 늦추지 않는 시선 새로 만나는 쓸쓸함과 눈발처럼 날아와 언 몸을 때리는 가난 그리고 끝없는 바람 그런 것들이 될 것임을 그땐 몰랐다 내 생의 남은 날들이 그럴 것임을 그땐 몰랐다 -졸시 <양안치 고개를 넘으며> 중에서눈 쌓인 산길 바로 아래는 낭떠러지가 이어지고 있었고, 고갯길 옆 산 쪽으로는 밤새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들이 가지를 부러뜨린 채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우두둑 하고 가지가 꺾이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개를 버스는 거의 기다시피 해서 넘곤 했습니다. 그 고개를 겨우 넘고 나면 몇 개의 검문소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승객들은 검문하곤 했습니다. 이런 낯설고 으스스한 풍경을 지나야 원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 경험한 이 겨울여행은 앞으로 내 인생에 이보다 더 험한 수많은 고개가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려는 신탁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고개 앞에 서면 언제나 큰 싸움을 앞에 둔 사람처럼 주먹이 쥐어지”고 “결연한 자세로 돌아서고 몸이 먼저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낯선 곳을 떠도는 눈발처럼 허망하고 시리고 쓸쓸한 것들도 저희끼리 모여 단단해지며 나뭇가지를 꺾던 기억이 떠오르고 낯선 곳에도 언제나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길이 있다는 걸 기억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개를 넘어 다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곳에서 함께 지내고 싶은 생각에 저는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 원주는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가 계시던 곳이었습니다.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메카인 곳이었습니다. 1965년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해 오시면서 장일순 선생과 만나 한국의 교회와 사회를 바꾸는 일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삼년 뒤인 1968년 장일순 선생은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하셨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1년에는 원주 엠비시(MBC)의 경영권을 쥐고 있던 5·16재단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가두시위가 열리곤 했습니다.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도 원주 캠프의 일원이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뒤에는 장일순 선생이 계셨습니다. 아니 박경리 선생도 외롭게 소설을 쓰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던 제게 원주는 추운 도시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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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아버지 찾아 넘던 양안치 험한 낭떠러지와 낯선 검문소는 내 인생에 더 많은 고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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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낭떠러지와 낯선 검문소는
내 인생에 더 많은 고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탁이었습니다. 원주는 추운 곳이다 겨울이 아닌 때도 춥다* 아버지는 몇 달째 소식이 없고 수업료 때문에 교무실에 불려갔다가 혼자 오는 초겨울 저녁길 핸들도 더 이상 내 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굳어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려 앉아 울었다 종일 별로 먹은 게 없었으므로 더 추웠다 도시 주변엔 총을 든 군인들이 많아서 냉랭하였고 한번 얼어붙으면 개천의 얼음도 사람도 몸을 잘 풀려 하지 않았다 동네 한쪽 벌판 가운데는 고아원이 있었고 나보다 더 큰 고아들이 떼로 몰려다니다 골목에서 슬쩍 내 사타구니를 훑고는 낄낄거리며 빠져나갔다 물 건너 학성동 재석이네 동네에 사는 여자들은 한낮이 될 때까지 자고 느직하게 물가에 나와 벗은 채 몸을 씻었다 강둑 이쪽에 엎드려 그 여자들의 거웃을 구경하곤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배가 고파서 접어야 했다 사랑채에 사는 여학생은 나보다 더 추워 1학년을 다니다 말고 극장 매표소에 앉아 있었다. 영화구경 할 돈은 없고 극장 주위를 맴돌며 간판을 그리며 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인의 아버지가 군인극장에서 영사기를 돌렸다는 건 아주 뒷날에야 알았다 쫓기는 시인을 숨겨 주곤 했다는 성당의 종소리도 그때는 듣지 못했다 내가 둑길을 따라 태장동에서 개운동까지 타고 다니는 녹슨 자전거 종을 따르르르릉 하고 울리느라 잘 듣지 못했을 것이다 역전 근처나 군고마 파는 길가에서 장일순 선생을 만났다 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장 선생보다 장작불에 탄 고구마 얼굴의 한쪽 그늘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원주는 추운 곳이다 겨울이 아닌 때도 춥다 어깨 부빌 거리도 없고 기대어 볼 만한 언덕도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뒤에는 더 그랬다 온기 잃은 칙칙한 교련복 한 벌 휑뎅그렁하게 걸려 있는 빈 방을 나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없어 자주 자위를 하곤 했다 아무도 없어서 나도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 원주를 떠난 뒤에도 발에 박힌 얼음은 오래 남아 살을 찌르곤 했다 그 추운 곳에서 박 선생님은 어떻게 소설에만 매달렸을까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나는 오랫동안 그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패싸움을 하다 자전거 체인 줄에 맞고 무릎을 꿇은 단구동쪽은 돌아보기만 해도 찬바람이 몰려왔으므로 에돌아 다녔다 외로움이 한 사람의 생을 밀고 가는 도시 너무 추워 스스로 온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도시 이제 슬픔도 적빈도 고양이 울음도 다시 살갑게 다가오는 도시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 그 여자에게 사라진 군인극장 근처로 나와 달라고 고등학생 목소리로 속삭이고 싶은 아픈 사랑의 도시, 원주 -졸시 <원주> 전문 시 중에 * 표시를 한 두 곳은 다 박경리 선생의 시 <객지>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박경리 선생이 그랬듯이 제게도 원주는 추운 곳이었습니다. “외로움이 한 사람의 생을 밀고 가는 도시”였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고 말씀하신 곳, 대문 밖에는 늑대와 여우와 까치독사와 하이에나가 으르렁거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소설을 쓰신 곳, 원주는 제게도 사방이 짐승들과 적막과 매서운 바람뿐인 도시였습니다.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였고,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박경리 <우주 만상 속의 당신> 중에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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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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