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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⑥
대학 3학년 봄 ‘미운오리새끼’라는 문학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손가락질받는 존재라는 불온함과 언젠가 백조가 되리라는 상승의지가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고독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은 물론 별개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십대가 된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은 내 성격을 점점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옆집에 사는 동기와도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 스쿨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말을 잘 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내리깔거나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집에 오면 잘 나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어려운 책이나 이상의 소설을 읽고 있는 저를 볼 때면 아버지는 ‘암사내처럼 어째 저 모양이냐’고 한숨을 쉬셨습니다. 저도 답답할 때는 방을 나와 무심천 둑을 걸었습니다. 하류 쪽으로 걸어가다 강둑이나 논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습니다. 잿빛 구름에 엉긴 채 능금빛으로 타오르는 노을은 고독할 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무대였습니다. 노을을 보며 네로의 손에 의해 불타는 도시 로마를 떠올렸습니다. 다 태우고 난 뒤에 그 위에 새로 세우고 싶은 도시를 그려보았습니다. 고흐의 불타는 밀밭을 생각하는 동안 교회당 종소리가 들려오고 새떼가 날아갔습니다. 화전민의 아들이 되어 보고도 싶고, 타히티를 가 보고 싶기도 하고, 붉은 포도주 한 잔을 생각했습니다. 양귀비 꽃 속에 묻혀 샤갈의 <마을 위의 여인>처럼 떠다니고 싶고, 비발디의 <사계> 제3악장 가을, 그 선율 속의 불의 축제를 생각했습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불꽃처럼 살다 가는 예술가들의 짧은 생을 생각했습니다. 미운오리새끼와 알리샤와 제롬을, 카추샤의 그 남자를, 베르테르를, 히스클리프를, 레기네와 키르케고르를 생각하고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시로 꽉 차 있는 시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꼼짝 않고 노을을 바라보는 동안 작은 청개구리가 무릎 위로 올라와 같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노을은 머리 뒤통수로부터 시작한 어둠에 야금야금 갉아 먹히고 있었습니다.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렇게 이어지는 박두진 시인의 시 <도봉>을 떠올렸습니다. 올 때처럼 <이사도라>의 음률을 그늘진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며 돌아왔습니다.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에 알맞았다 백 년에 이백 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삶은 매캐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부터 일찍 어두워졌다 내가 눕는 윗목에는 그릇의 물이 바로바로 얼었고 내 몸도 밤새 달그락거렸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나는 말이 없었고 한 마을에 사는 친구와도 졸업 때까지 두세 마디 짧은 말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할 때도 눈을 내리깔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영하의 숲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야는 길었고 일찍 진 해는 늦게 떠올랐다 수렵을 그만둔 아버지도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나도 각각 우울하였다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기에 좋았다 고독한 늑대 한 마리 멀리서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 고독한 것들에게 보낸 자작나무 엽서는 어느 숲과 바람 속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저녁이면 어둠과 칼바람이 친구처럼 찾아와 오래 곁에 머물곤 했다 -졸시 <빙하기> 전문 아버지는 도시락 대신 소주병 하나를 싸들고 일을 나가셨고, 정착할 곳을 찾아 추운 땅으로 옮겨 다니는 우리의 겨울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자주 우울하였습니다. 그러나 빙하기를 사는 동안 추위는 사람을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저도 아버지처럼 노동을 했습니다. 담배재건조장에 나가 담배가마니를 지어 나르는 동안 하루에 장갑 한 개가 다 닳아 없어지곤 했습니다. 십오 명이 한 조가 되어 30톤 정도를 지어 나르면 일당 육칠백 원을 벌었습니다. 담배가마니를 까마득하게 실은 리어카를 끌고 커브를 돌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공에 붕 뜬 채 리어카 체대에 스무 살 청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세상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위선과 가식과 기만과 차별에 구역질 날 때도 많았습니다. 시시포스처럼 절망적인 노동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우리의 생이 미웠습니다. “계란과 같이 자체로서 충만해 있으며 산맥과 같이 변화가 없고 정말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한 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로 해서 마네킹처럼 허깨비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인 자기 기만의 세계, 부정이나 시간성이 없고 가능하지도 않고 필연적도 아니며 설명할 수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며 아둔하고 불투명한 세계” 그런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불만을 쏟아놓을 수 있는 통로, 세상을 향한 야유 그리고 반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이런 불만을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사르트르는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의식과 동의어라고 했습니다. 의식은 지각한다는 것으로 혼돈스러운 사물들 사이에서 하나의 형태를 잘라내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어렵기 그지없는 사르트르의 철학과 소설 <구토>를 읽거나 사르트르에 관련된 자료를 공책에 옮겨 적으며 저는 “불만이 있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되어야 할 존재, 제 스스로 제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할 존재이다”라는 데 밑줄을 그었습니다. “인간에겐 자유가 있고 자기의 인생을 선택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겐 이미 주어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은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단 한번의 귀중한 실험이다. 모든 인간의 생애는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크고 넓은 길을 찾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고, 작고 좁은 오솔길의 암시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헤세는 알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에 견주어 이야기합니다. 그 새는 신 곁으로 날아가는데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했습니다.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 환희와 전율의 병존, 가장 신성한 것과 가장 추악한 것의 뒤섞임, 티 없는 순결성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냄새 그것들이 결합한 이름이라는 데 우리들의 눈은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무 살을 넘긴 지 몇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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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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