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10.08 19:58 수정 : 2010.10.08 20:03

서른둘 젊디젊은 날에 ‘접시꽃 당신’은 떠났습니다.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15

꽃잎에 겹치던 파리한 얼굴…
당신 뒷모습만 보며 살았다는 그 말…
아내는 비 내리던 칠석날
눈을 남기고 그렇게 묻혔습니다

아내가 토혈을 한 것은 첫아이를 낳고 난 이듬해 봄이었습니다. 모내기를 하려고 이른 아침부터 집안이 부산한 날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십이지장궤양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도 크게 걱정할 건 아니라고 해서 입원 치료를 한 뒤 벼가 조금 자랐을 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을걷이를 할 무렵 아내는 또 토혈을 했습니다. 의사는 천공이 생겨서 피가 고였다 넘어오는 것 같은데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뱃속에 아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하게 되면 아이를 지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중으로 어려운 수술을 해야 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도 살리고 아이도 살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러면 수술을 하는 대신 약물 치료를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겨울을 지내고 무사히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뒤 병원엘 갔는데 의사는 이상하다고 하면서 소견서를 써 줄 테니 서울로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암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일 년이 넘게 병원을 다니면서 검사를 받고 치료를 해 왔는데 이제 와서 암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했지만, 의사 말대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다시 자세히 검사를 해 보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암전문병원인 원자력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마찬가지로 암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담벼락이 기울며 무너져 그걸 손으로 받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길어야 6개월 아니면 한두 달밖에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이었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거대한 암병동인 원자력병원에서 만나는 환자들도 거의 희망이 없는 채 병과 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원 복도나 정원을 오고 가는 환자들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아니 절망을 만나면 더욱더 희망을 붙들고 놓지 않게 되는 게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하고 싶었습니다.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한다면 평생을 걸려서 한다 해도 할 것 같았습니다. 암병동의 현관 뒤쪽 날바닥에 앉아 “희망을 가진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빛이 보이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암병동>), 그런 시를 썼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암세포를 억제하기 위한 약물이 정상세포도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걸 견뎌내야 하는 일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몸은 무너지는데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견딜 수 있는 모순된 상황 속에 놓이게 됩니다. 정신력이 아무리 높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진통제를 맞아야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갔습니다.

서른둘 젊디젊은 날에 ‘접시꽃 당신’은 떠났습니다.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그래서 항암치료를 일주일 정도 받으면 퇴원하여 3주 정도 몸을 추스른 다음에 다시 치료를 받으러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 기간은 집에 내려와 있거나 청주에 있는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한번은 낯모르는 아주머니·할머니들이 문병을 오셨습니다. 막내고모가 다니는 성당에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환자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분들 뒤에 앉아 있다가 이른바 민중시를 쓴다는 나는 저분들처럼 남의 아픔을 향해 저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들처럼 내 이웃이 아파할 때 내 발로 찾아가 보았던가? 찾아가 손을 잡고 진심으로 위로하면서 아파해 보았던가? 그런 마음으로 이웃을 위한, 민중을 위한 문학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문학은 목소리나 선언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진정성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진심어린 행동으로 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게 문학을 하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저렇게 나약하지 않으면서도 온유하고,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한 삶이 있는 것인데, 나는 선악의 이분법, 강온의 이분법, 저항 아니면 비굴이라는 도식으로 세상을 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중시야말로 민중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사람을 살려야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암을 이긴 이들이 썼다는 약 이야기를 들으면 전국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당사자에겐 병명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본인에게 병명을 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아 말을 하지 못하고 자꾸 미루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더 미룰 수 없게 된 날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해 주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밤을 새우다시피 했습니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는 밤이었습니다. 아침에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출근을 하는 동안에도 내내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청주시를 빠져 나온 버스가 청원군 부용면 어디쯤을 지날 때였습니다. 시골집 담벼락에 줄지어 핀 하얀 접시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몸에서 계속 피가 빠져나가며 창백해져 있는 아내의 얼굴이 그 꽃과 겹쳐 보였습니다. 빈 도서실로 올라가 종이에 아내에게 해 줄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울면서 썼습니다.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남들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졸시 <접시꽃 당신> 중에서

그때 우리는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황망한 일이었지만, 여기서 생이 끝나고 만다면 무엇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바르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런 날이 짧아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성한 곳이 있다면 주고 가자고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겠다고 했습니다. 병상에서 이 시를 읽어주며 저는 울었지만 아내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자기가 죽거든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가덕공원묘지 옥수수밭 옆에 묻은 날은 칠석날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한 남자로서 한 여자에게 너무 잘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끼리 만나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아내가 결혼반지를 빼서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해 주는 동안, 저는 옷 한 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속이 아파 잘 먹지 못하는 걸 보고 매일 우유 하나씩 사들고 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병상에 누워 그동안 당신의 뒷모습만 보면서, 그 뒷모습을 용서하면서 살았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학교로 가는 뒷모습,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 있는 뒷모습, 시를 쓴다는 이유로,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그냥 지켜보아야 하는 뒷모습.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돌처럼 자리잡고 앉아 떠나질 않았습니다.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졸시 <섬> 전문

도종환 시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