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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시/ 그림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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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시 17
그들은 일거수일투족을
늘 어딘가에 보고했습니다
때론 위축되기도 했지만
순박한 아이들과 자연의 풍만함이
시를 쓰고 엮게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됐던 다섯편의 시가
시집 맨 앞에 차례로 실렸습니다
문제교사(?)를 전입 받은 동이중학교에서는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철저히 관리를 하고 매월 정기 보고를 하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다가 수업 시작하는 종이 울리면 책상 위에 그 책을 펼쳐 놓은 채 교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빠트린 게 있어서 다시 교무실로 되돌아가는 적이 있는데, 가 보면 교감이 제 책상 앞에 서서 제가 읽고 있던 책에 대해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습니다. 제가 읽는 책, 제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 자주 만나는 사람, 찾아오는 이에 대해서도 일일이 확인을 합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지나가다 들르셨는데 신원을 확인하고 보고하는 일도 있었고, 동이중학교로 오기 전에 근무했던 학교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교감이 언성을 높여가며 강제로 쫓아내는 걸 본 적도 있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연극연출가 박종갑 형이 중봉충렬제라는 문화제를 구경하기 위해 옥천에 내려왔다가 학교로 전화를 했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교감은(그 당시는 교무실에서 사용하는 전화가 교감 책상에 한 대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바꿔 달라고 하자 대뜸 어떤 사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친구 사이라고 했더니, 다시 어떤 친구냐고 묻더랍니다. 지방에서 연극 연출하며 사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마땅한 벌이도 없고 변변한 직장도 없이 지내는 터라 열정이나 자긍심 외에 가진 게 없는 이가 대부분인데 ‘이름이 뭐냐?’, ‘뭐하는 사람이냐?’, ‘어디서 만난 친구냐?’, ‘학교 동창이냐?’,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냐?’ 등등을 시시콜콜 물어오면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하고 대답했더니 교감은 전화를 바꾸어 줄 수 없다고 하더랍니다. ‘지금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하고 재차 물었더니 자리에 있는데 바꿔 줄 수 없다고 말하더랍니다. ‘왜 바꿔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우리는 도종환 선생 친구라면 다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바꿔줄 수 없어요’ 하면서 전화를 끊더랍니다. 본인이 지나치게 주어진 역할 이상을 앞장서서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교감도 분명 무슨 지시가 내려와서 그러는 것일 텐데 어느 기관에서 어떤 지시를 어떻게 하라고 내린 것인지 저도 그저 추측과 상상을 하면서 분을 삭이거나 늘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행동이 위축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한 학년이 두 학급밖에 되지 않는 그 시골학교에서도 국어시간에 학생들 글쓰기 지도를 해서 모인 글을 <강마을 아이들>이란 이름으로 온누리출판사에서 출간하게 되었는데 책을 아이들과 선생님들께 나누어 드리고 교감에게도 드렸더니 ‘왜 책의 저자를 교장선생님으로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의 저자는 교장이 아니라 학생들이며, 그래서 책표지에도 동이중학교 학생 글모음이라고 했고, 저는 이 아이들의 글을 지도하고 엮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도종환 엮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교감은 학생들 글을 모은 책이라도 학교 이름이 나오는 책이면 교장 이름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저는 이 책은 아이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고 학교예산으로 낸 책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아니냐고 하면서 옥신각신하게 되었습니다. 교감은 교장을 위해서 이렇게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는데, 교무실 옆에 붙어 있는 교장실에서 이런 고성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일언반구를 하지 않는 교장을 향해 “궂은일은 다 나한테 맡기도 돈은 자기가 다 타서 쓰고…” 하면서 볼멘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매월 감시와 동태보고를 하기 위해 일정한 돈이 상부기관 어디에선가 내려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보고를 잘 해주었는지 알아!” 하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매월 17일경이 정기보고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순박하고 선생님들도 다 좋은 분들이어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학교는 외진 곳에 있는 작은 학교였지만 거기도 오월이면 붓꽃이 피고 뻐꾸기 울고, 유월이 되면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숙직을 하는 날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다 돌아간 텅 빈 교정을 혼자 거닐며 시를 쓰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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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편지> <유월이 오면> <저무는 강 등불 곁에서> <적하리의 봄> 그런 시들을 유배지에서 썼습니다. 적하리는 학교가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전교조 일로 고생도 많이 한 후배 교사 김성장 시인의 고향동네이기도 합니다. 유배지에서 시를 쓰며 지내던 어느 날, 실천문학사에서 일하고 있던 문우 김사인 시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시집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나 하는 시들을 시집으로 내느냐고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고 마음을 정리하는 차원에서라도 시집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계속 설득하는 말을 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시집으로 내도 괜찮을 작품들인지 욕먹는 일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은 채 86년 가을인가 작품을 정리해서 실천문학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2월 초에 시집이 나오기 직전 <주간조선>의 박승준 기자가 시집 교정지 복사본을 들고 동이중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저도 기자가 찾아온 게 처음이어서 뜻밖이었지만 교감은 기자가 찾아오자 우선 명함을 받아들고 진짜 기자인지 아닌지 신원확인을 해야 한다고 지서에 신원조회를 확인하는 전화를 걸었습니다. 답신이 바로 오지 않자 이어서 옥천군 교육청과 충청북도 교육청(당시는 교육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보고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집 교정지 복사본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시를 본 뒤에는 시가 문제가 된다고 하면서 기자를 붙잡아 놓고 있었습니다. 기자와 인터뷰가 끝나고 학교 앞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교감은 거기까지 따라와 뒷방에서 연신 전화를 거느라 분주했습니다. 식사를 다 하고 박 기자가 가려고 하자 무슨 지시를 기다리는지 조금만 더 있으라고 하면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지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맞다고 한다면서 박 기자에게 교감은 “내가 도종환 선생을 위해서 이렇게 신경을 써줘도 글쎄 도 선생은 나한테 술 한 잔 안 사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당 앞에 서 있던 박 기자와 나는 큰 소리로 웃고 말았습니다. 시골에 와서 수모를 당한 박 기자는 그해 12월 13일자 <조선일보>와 12월 21일자 <주간조선>에 박스 기사와 특집 기사를 쓰면서 수모의 기억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을 하지 않고 시집에 대해서만 기사를 썼고 그 기사의 파문은 엄청난 크기로 퍼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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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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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림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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