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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05 19:42 수정 : 2010.11.05 19:47

마른버짐 핀 어린 얼굴들이 “사랑했다” 도닥였습니다/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19

유월엔 이한열이 쓰러졌습니다
최루탄 가득한 대전의 거리에서
길잃은 아이와 함께 울었습니다
6·29가 나면서 시골학교를 떠났습니다

쫓겨 간 학교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생활하는 선생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얼굴을 보면 힘이 났습니다. 시골 학교 중학생들이었지만 과꽃 같은 아이들, 봉숭아꽃 같은 아이들, 달리아 같은 아이들, 햇감자 같은 아이들, 갓 캐어낸 고구마 같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엄마가 캔 고구마는/ 엄마 얼굴 닮고// 내가 캔 고구마는/ 내 얼굴 닮았다”고 시를 쓰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두고 온 어릴 적 고향의 냄새가 이 아이들에게서 났습니다. 겨울이면 연을 만들어 날리고, 눈 쌓인 뒷산에 토끼 올가미를 놓고, 대보름날 밤이면 밥 훔쳐 먹으러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 그걸 알고 어머니들이 부뚜막에 잡곡밥과 나물을 모른 체 놓아두곤 하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신발을 양손에다 벗어 쥐고 맨발로 노래 부르며 집으로 가는 아이들, 맨발에 닿는 진흙의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아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마른버짐 핀 어린 얼굴들이 “사랑했다” 도닥였습니다/ 그림 이철수
아이들 앞에 서면 내 슬픔, 내 시련 같은 건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 편에 서는 교사,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아침마다 직원조회를 했는데 조회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학생들과 만나는 하루 생활 첫 시간은 늘 그런 지시사항과 전달사항을 전하고 확인하는 조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는 교실에 들어서면서 “떠들지 마!” “조용히 해!” “잘 들어!” “주목!” 이런 명령조의 말로 말문을 열었고, 경직된 형태의 만남이 매일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실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말문을 여는 방식의 만남을 시도했습니다. “명순이 머리 예쁘게 잘랐네”, “비가 오는데 옷 젖은 사람은 없니?” 하면서 하루 생활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니면 짧은 이야기나 예화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우화나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모아두었다가 들려주거나, 신문·방송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겪은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그날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미리 모아 두었다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지? 오늘은 일제강점기 때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날이야.” 이런 식의 조회를 내 나름대로 계획을 짜서 운영했습니다. 이것을 각각 대화조회, 예화조회, 역사조회로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마른버짐 핀 어린 얼굴들이 “사랑했다” 도닥였습니다/ 그림 이철수
하루 생활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노래에다 그날 있었던 일이나 그날 배운 교과 내용 중에 재미있었던 것,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노랫말로 만들어 함께 부르는 시간입니다. 이 일을 맡은 학생들이 있어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모여 공동창작한 뒤 작은 칠판에 적어 놓습니다. 그걸 보고 즐겁고 재미있게 노래 부르며 하루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신석기 시대에 대해 배우고 난 뒤 ‘고향의 봄’ 곡조에 맞추어 “남녀차별 범죄와 빈부도 없이/ 차별 없이 일하던 때 그립습니다” 하고 함께 노래합니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하고 시작하는 ‘솔개’라는 노래에다 “우리는 욕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생각 없이 내뱉어진 욕설로 멀어져간 나의 친구여” 하고 노랫말을 바꾸어 불러서 욕 제일 잘하는 대성이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

교실 뒤칠판을 학생들 스스로 꾸미고 활용하게 했습니다. ‘학습판’ ‘시사란’ ‘새마을’ 등으로 나누어진 곳을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놓는 곳으로 바꾸었습니다. ‘들어 주세요’ ‘함께 읽어 봅시다’ ‘알아 둡시다’ 이런 난으로 나눈 뒤 수시로 학생들이 공간을 채우고 써 넣게 했습니다. 시를 써 넣기도 하고, 운동장에도 수도를 설치해 달라는 건의 사항을 써 넣기도 하고, 저희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웃는 얼굴로 수업을 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애교 섞인 말이 쓰여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감이 수업 중에 교실을 순시하다 들어와 보고는 다 없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반만 이런 식으로 교실을 꾸미느냐?’ ‘규정에 어긋난다’ ‘지워라’ ‘없애라’ 하면서 실장을 불러 지시하고 호통치고 그러면 학생들은 그걸 울면서 없애고 내가 다시 써 넣으라고 하면 다시 만들었다가 또 교감에 의해 지워지는 일이 되풀이되곤 했습니다.


정치 정세도 불안정해 직선제 개헌에 대한 요구를 전두환 대통령이 4월13일 호헌조치로 대답하고, 그 호헌조치에 대해 저항하는 국민적 요구가 전사회적으로 폭발해 올라오는 때였습니다. 유월로 접어들면서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졌고 넥타이를 맨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산골에 사는 저는 서울까지 갈 수는 없고 대전으로 나가 시위행렬과 함께 거리에 서 있곤 했습니다. 한번은 가까이서 터지는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다 길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를 안고 골목으로 피해 달려가다 시장 안 생선가게의 비린내 나는 물로 얼굴을 씻으며 최루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뿐인 손수건으로 아이의 눈과 입을 가리고/ 차마 뜨이지 않는 아픈 눈자위를 손등으로 부비며/ 아이와 함께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더 가면 괜찮다/ 아가, 너희는 최루탄 없는 세상에서 살아라 달래며/ 눈이 매워서가 아니라 북받쳐 오르는 분노 때문에/ 우리는 울고 있습니다”(졸시 <아가, 너희는 최루탄 없는 세상에서 살아라> 중에서) 그런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대전역에서 도청까지 이어지는 가득한 시위대열이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시위대에 갇힌 채 장비를 다 빼앗기고 두려움에 떨며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저녁에 6·29선언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돌아와 밤길을 걸어 하숙방으로 혼자 걸어가는 동안 입에서 낮에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하는 대목에 이르자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6·29선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북도 교육청에서 장학사 한 분이 학교를 찾아왔습니다. 장학사는 지나가다 들렀다고 하면서 청주로 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청주로 들어가느냐? 규정도 그렇고 근무점수도 청주로 갈 만한 점수가 아니라는 걸 장학사님도 알지 않느냐?” 그랬더니, “아이, 왜 그러세요? 가셔야지요” 하는 겁니다. 저로서는 도대체 무슨 깜냥인지 알 수가 없는데, 학교에서는 제가 곧 청주로 가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제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중앙일보> 기사를 보고 어떤 분들이 집단으로 교육감 앞으로 민원을 넣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6·29선언과 집단 민원의 여파로 그해 가을 청주로 발령이 났습니다.

잘 지내던 시골 학교 아이들과 갑자기 헤어져야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에게 이임인사를 하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마이크가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했습니다. 마른버짐이 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어깨를 들먹이고 있는 아이들을,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을, 고개 꺾은 해바라기가 줄 지어 선 학교 뒤뜰을, 내 생애의 못다 한 한 시절을 그냥 거기 둔 채 돌아서는데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렸습니다.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

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

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비바람 속에서도 다시 피던 봉숭아 잎이 안개비에 젖고

뒤뜰에 열 지어 선 해바라기들도 모두 고개를 꺾었구나

세월의 한 구비가 이렇게 파도칠 때마다

다 못 나눈 정만 흥건히 담아둔 채 어린 너희들의 가슴에 잔물지는 아픔을 심는구나

나는 다만 너희들과 같은 아이들 곁으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달래도

마른버짐이 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나의 말을 자꾸 멈추게 하는구나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 졸시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전문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떠나는 저에게 아이들이 크고 작은 선물 하나씩, 편지 한 통씩을 가지고 왔습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그걸 펼쳐보았습니다. 그중에 학교까지 걸어오는 데 한 시간도 더 걸리는 궁벽진 마을에 사는 진희의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을 걸어도 대답을 잘 들을 수 없는 진희, 복숭아빛 발그레한 볼의 단정한 진희, 공부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닌 진희의 편지는 딱 한 줄이었습니다. 거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선생님 사랑했어요.”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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