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11.12 21:34 수정 : 2010.11.12 21:46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0

‘O양의 유서’를 무대에 올리고
저도 관객도 울었습니다…
교사협의회가 결성되자
문제교사 식별법 공문까지 왔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이란 시에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저는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6월 항쟁과 6·29선언의 여파로 집이 있는 청주로 올라오면서 저는 정말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이곳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교육운동 단체를 만드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화운동 단체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일 년 전인 1986년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가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70년대 충북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앞장서서 이끈 분은 고 정진동 목사님과 조순형 전도사님 같은 종교인들이셨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충북지역에서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 두 사람이 김재수, 김형근입니다. 김재수는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 우진교통의 대표를 맡아서 아직도 성실하고 모범적인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며,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김형근은 현재 충청북도의회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들과 학생들,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의 문화 분과를 맡고 있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분화된 부문운동으로서의 문화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무용극을 시도하던 강혜숙 교수(전 국회의원)와 우리춤연구회의 오세란 등이 무용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문학 쪽에서 ‘분단시대’ 동인들과 젊은 문인들이 있었으며, 판화가 이철수(현 민예총 부회장)가 86년에 제천 박달재 밑 평장골로 이사 와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었고, 이홍원(현 충북 민예총 회장)과 김기현(현 청주 민예총 회장) 화백 등 민미협 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녹두패라는 노래운동 단체가 결성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연극인 박종관(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유순웅(천 회 공연을 돌파한 일인극 <염쟁이유씨>의 주인공) 이들이 중심이 되어 그해 12월 4일에 현 충북민예총의 전신인 충북문화운동연합을 결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강혜숙 교수와 이철수 화백 그리고 제가 공동의장을 맡았다가, 이철수 화백과 제가 둘이 의장을 하다가, 나중에는 저 혼자 이 단체를 이끌어 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함께 책임을 맡아 단체를 이끌던 이철수 화백이 중요한 일을 맡게 되어 공동의장직을 더는 수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뼛거리다가 평장골 동네 반장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지역 문화운동, 그 가난하고 힘든 길을 함께 가고 있는 동료, 후배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그때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정국이 꼬이기 시작하고 탄압을 이겨내기도 힘든 때라서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술가가 낙향하여 지역에 뿌리내리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하였고, 당장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통일춤으로 많이 알려진 강혜숙 교수가 우리춤연구회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무용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육문제를 내용으로 하는 무용극이었는데 저도 함께 대본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며 그 유명한 를 공연에 삽입하였습니다.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

공부만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

공부만 한다고 잘난 것도 아니잖아?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이 사회에 봉사,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그것이 보람 있고 행복한 거잖아.

꼭 돈 벌고, 명예가 많은 것이 행복한 게 아니잖아.

나만 그렇게 살면 뭐해?

나만 편안하면 뭐해?

- 중에서

1986년 1월15일 새벽에 O양은 이 유서를 써 놓고 세상을 떴습니다. 이 유서를 공연에 삽입하기 위해 유서를 읽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공연 중에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낭독되는 유서는 거기 온 많은 이들을 울렸고, 이렇게 죽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을 하게 했습니다. 저희는 청원군 매포수양관에서 열리는 전국교사협의회 연수에 참여한 교사들에게 이 공연을 보여주었고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해 겨울부터 전국 20개 도시에서 80회 이상의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충북교사협의회는 1987년 11월21일에 창립을 했습니다. 그해 9월 전남교사협의회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교사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충북에서도 저와 김미영 선생(전 전교조 부위원장) 등이 청주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만나 소모임을 해 왔고, 광주항쟁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나온 고 권영국 선생과 지난번 선거에 충북교육감후보로 출마했던 김병우 선생 등이 모여 민주적인 교사 모임을 꾸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30대 초반 20대 후반의 교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와이엠시에이에서 윤구병 교수 초청강연을 하면서 첫 모임에서 17명이던 교사들이 3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한 교사들이 몇백 명이 넘게 되면서 11월에 어렵게 창립을 한 것입니다. 저는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교사협의회가 결성되자 “교사협의회에 참여하는 교사는 교직을 그만 둘 각오를 할 것” 이런 지시가 교육청을 통해 교장단 회의 전달사항이란 이름으로 직원조회 시간에 공개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감시는 더 심해졌고 심지어 문제교사 식별법이란 공문도 내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열성적인 교사, 학급신문이나 학교문집을 만드는 교사, 풍물을 지도하는 교사…” 등등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열성적이면 문제교사로 찍히는 시대였습니다.

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사례를 찾아내라고 해서 교장 교감이 교실을 순회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봉양의 어느 중학교에서는 교장이 교실 순회를 하다가 뒷칠판에 붙어 있는 시를 발견하고는 베껴 적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렇게 시작되는 시였습니다. ‘남의 땅?’ ‘빼앗긴 들이라!’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용히 뒷자리에 앉은 학생을 복도로 불러내어 물어보았습니다. “얘, 니네 반에 이상화라고 있니?” “그분 시인인데요.” “시인?” “응 시인이라도 괜찮아, 알았어.” 그러며 그 긴 시를 적어가기도 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저는 교감선생님이 상담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대학동창회보에 재수록된 시를 보여주며 “이 시에 나오는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가 맞지?” 하고 묻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식민지가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뜻이지?” 하고 추궁하는 거였습니다. 그 시는 시집 <접시꽃당신>에 실려 있는 <앉은뱅이 민들레>라는 시였는데 “나 죽은 뒤 /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을 교감선생님은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 시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에서 쓴 시인데 그걸 문제 삼고자 하는 거였습니다. “진달래꽃이 문제가 된다면 저보다 먼저 김소월을 잡아넣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하고 말했더니 교감선생님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나가셨습니다. 회전의자를 홱 돌려 앉으며 “나는 왜 이렇게 복이 없을까? 교장 한 번 해 보려고 했더니, 어디서 저런 게 굴러와 가지고, 에이구” 하며 교사들이 다 들리게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베스트셀러 시인이라고 연일 신문 잡지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하고, 시집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떠들썩한데 안에서는 그렇게 지내며 있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검푸른 하늘 위로 싸아하게 별들이 빛나고

온 들을 서리가 하얗게 덮는 동안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

아직 길이 나지 않은 저 숲에는 녹슨 철망도 있다 하고

발을 붙드는 시린 계곡물과 천 길 벼랑도 있다 한다

잠 못 드는 이 밤 산짐승 울음소리가 가까이에 들리고

어쩌면 겨울이 길어

바람 또한 질기게 살을 때리며 뒤를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눈물로 가야 할 고난의 새벽이 가까워 오는 동안

이 길의 첫발을 우리로 택하여 걷게 하신 뜻을 생각했다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함께 떠나기로 한 벗들을 생각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첫새벽을 택해 묵묵히 이 길을 떠났는지

어찌하여 우리의 싸움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우리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이 땅에 문신처럼 새겨진 뒷날에는 꼭 기억케 될 것임을 생각했다

-졸시 <새벽을 기다리며> 중에서

시인, 그림 이철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