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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19 20:24 수정 : 2010.11.19 20:27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사람 나의 시 21

어린 자식들 누가 돌보냐며
탈퇴서 쓰고 가자는 아버지…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
교도소로 이송되는 길목
울고계시는 어머님을 봤습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건장한 다섯 명의 형사가 교무실에 들이닥친 것은 아이들과 야영을 다녀온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야영장 강가에 텐트를 치고 직접 밥을 지어 먹고 산행을 하고 밤에는 높이 쌓아올린 장작불 주위를 돌며 손잡고 노래하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채 가라앉지 않은 때였습니다. 참 즐거웠던 이박 삼일의 여운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상태로 성적표 가정통신란을 쓰다가 둘째 줄을 다 못 쓰고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차를 탔습니다. 선생님들도 놀라고 저도 황망하였습니다. 경찰차가 학교를 떠날 때 뒤를 돌아다보니 차창 밖으로 아이들이 울면서 달려오는 게 보였습니다.

그림 이철수
나중에 어느 아이가 쓴 글을 보니 삼학년 아이들이 복도로 몰려나와 ‘아침이슬’을 불렀고, 이걸 알고 달려온 학생주임에게 얻어맞고 교실로 쫓겨 들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경찰서에 끌려가고 난 뒤 학교에서는 학부모들을 불러 제가 그동안 얼마나 문제가 많은 교사였는지, 제가 맡은 학급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저질렀고, 성적은 또 얼마나 뒤처지고 있는지, 이런 걸 상세히 설명하였고, 집집마다 가정통신문을 보내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목숨을 끊으며 견딜 수 없어 하는 잘못된 교육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법으로 보장된 교사들의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고,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정되고 있는 교원노조를 우리도 만들어서 단체교섭을 통해 비민주적인 교육구조와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교육환경을 개선하려면 이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교육세를 걷으면서 초등학교 과밀학급 해소, 중학교 무상의무교육 실시, 고등학교 시설 개선 등에 쓰겠다고 했던 약속은 지키지 않은 채 5년간 거출기간을 연장한다는 발표에 저희는 실망했습니다. 중학교 무상의무교육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마침 그해, 89년 3월9일 국회에서 교직원노동조합 결성을 인정하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그 법안에는 “6급 이하 공무원을 포함한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고 단체교섭을 행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교사의 노동조합 결성을 가로막았던 국가 공무원법 66조는 자동폐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안이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확정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노동조합법이 국회를 통과했음에도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는 것을 본 교사들은 직접 나서서 투쟁하지 않고는 어떤 권리도 얻을 수 없고, 어떤 악법도 개정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독약은 약이 아니라 독이듯,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이지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악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고 성서에서는 말합니다. 고장난 신호등을 고치지 않고 고장나기는 했지만 신호등이니 계속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 길에서 기다리겠습니까? 고쳐서 길 역할을 하는 길로 만드는 것이 잘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교사들은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싸움에 몸을 던지게 되었고, 그 일이 아이들과 이 나라 교육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4·19 혁명과 3·15 부정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면 징계를 받는 게 당시 교육계의 현실이었습니다. 통일교육을 하면 좌경의식화 교육을 한다고 의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하고 같이 일했던 강성호 선생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북한 사진을 수업시간에 보여주면서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주민들도 생각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가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매도당하고 고발당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강 선생이 북침설을 주장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했다고 진술한 학생이 반 전체에서 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에는 당일 결석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그런 왜곡된 고발과 감시와 잘못된 언론보도도 많았습니다.

‘헤어져 살아온 45년’이란 연호를 쓰도록 유도하는 등 의식화 교육을 한다고 고발당한 최아무개 선생은 북한의 샛별국교를 찬양하고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노래를 가르쳤다고 매도당해 담임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런데 샛별국교는 북한에 있는 학교가 아니라 경남 거창에 있는 학교로 <한국방송>(KBS) 텔레비전에서 <들꽃은 스스로 자란다>는 프로그램으로 소개한 바 있는 학교였습니다. 진달래꽃 노래도 북한 노래가 아니라 오펜바하가 작곡하고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유경환 시인이 작사한 ‘진달래꽃 처녀’였습니다.


초등학생에게 ‘해방가’를 가르친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신문도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운동권 노래를 가르치면서 의식화시키는 게 전교조 교사들이라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해방가’ 역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 선생이 쓴 시에 작곡가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원제목은 ‘독립행진곡’으로 8·15 해방 직후 교과서에 실린 노래였고, 저는 어려서부터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 때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보았습니다.

경쟁 위주의 비인간적인 입시교육 때문에 학생들이 일 년에 백몇십 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소리야. 일본은 일 년에 사백 명씩 죽어. 일본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 하고 말하는 교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어떻게든 잘못된 교육구조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교사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요구가 터져나온 것이 교원노조 결성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었고, 저도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오게 된 것입니다.

이튿날 아버지가 경찰서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고는 “나갈 방법이 있다. 탈퇴서를 써 주면 교육청에서 풀어주겠다고 애비에게 약속했다. 얼른 써주고 나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는 나갈 수 있어요.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여기 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내일이면 나갈 거예요.” 이렇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에미 없는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란 말이냐? 네 새끼를 네가 돌봐야지. 너는 다른 사람하고 처지가 다르지 않니? 네가 탈퇴서를 써도 다른 사람들이 다 이해한다. 걱정 말고 써라” 하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그 말씀에는 뭐라고 대답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걱정 마세요. 곧 나가요”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그러면 부자간의 의를 끊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사람 나의 시
그래도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설마 교도소까지 가지야 않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큰 죄를 지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찬 뒤 교도소로 넘어가는 차를 타고 경찰서를 돌아 나오다 경찰서 담에 이마를 대고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한테 너무 큰 죄를 짓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는 면회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쇠창살에 이마를 대고 어두워 오는 하늘을 봅니다.

벽에 어린 내 그림자는 미동도 않습니다.

어두워 오는 하늘 먼 곳을 불안한 천둥소리가 질러갑니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지금쯤 아이들은 울음을 그쳤을까

하루아침에 고아가 돼 버린 내 아이들

며칠째 울먹였다던 학교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버리기 힘든 게 마음이어 가슴 아픕니다.

명예는 버릴 수 있어도 못 버리는 게 마음이어 아픕니다.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도 못 버리는 게 마음이어 아픕니다.

평생 눈물밖에 드린 게 없는 어머님께

두 아이와 눈물 한 무더기를 더 얹어드리고 돌아서면서도

버릴 수 없는 게 마음이어 아픕니다.

- 졸시 <쇠창살에 이마를 대고> 중에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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