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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17 20:07 수정 : 2010.12.17 20:07

그림 이철수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5)

기자회견·인사말 한 게 죄라니
법정은 웃음바다가 됐습니다
대법원 선고 벌금 30만원…
그 정도 죄로 감옥살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투옥 기록은
오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피고는 1989년 5월 14일 청주시 사창동 소재 푸른교회에서 교직원 70여명이 모여 개최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 결성 발기인대회에 참가하여 박수로써 지부장을 선출하는 등 노동운동을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까?”

재판이 열리던 날 법정에서 검사는 그렇게 물었습니다. 긴장하고 앉아 있던 나는 “네, 박수를 치는 등 집단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피고는 같은 달 21일 19시경 청주시 우암동 소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북지부 사무실에서 김병우 등 4명의 교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여 노동운동을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까?” 검사는 준엄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습니다.

“네, 기자회견 같은 집단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피고는 같은 달 22일 19시 30분 청주시 봉명동 소재 봉명교회에서 청주청원지역 교직원 40명과 재야인사 10명이 모여서 개최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청주청원지회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인사말을 하는 등 노동운동을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까?” 검사는 다시 또 물었습니다. 저는 검사의 말을 받아 “네, 인사말을 하는 등 집단행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제 대답을 듣고 있던 법정은 순간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야유가 터져 나오기도 했고 한마디씩 거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그렇게 큰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구속까지 시킨 것치고는 법정에서 죄라고 추궁하는 것이 너무 어이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수를 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인사말을 하는 집단행위를 해서 지금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제 입장을 진술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해 제가 이 일에 나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나라 역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교과서 역시 그 잘못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군부독재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진실을 왜곡 은폐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미화한 교육 내용을 담고 있는 교과서를 고쳐 본 적이 없고 바르게 가르쳐 볼 수가 없었습니다. 친일을 한 문인, 지식인에 대해 사실대로 가르칠 수 있는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그림 이철수
독재자의 사진을 다른 독재자의 사진으로 바꾸어 걸어놓은 교장실에 앉아 교장은 교사가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강변했습니다. 저희야말로 진정으로 교육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치중립이란 입장의 무입장을 강요받는 경우나 정권편의주의에 의해 이용당해온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제가 80년 초 부강중학교에 근무할 때 제게 주어진 업무 중의 하나가 ‘대통령 각하 지시사항 전달’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어디 순시를 나가거나, 내각에 지시한 사항이 있거나,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있으면 그게 교육과 관련된 일이건 아니건 간에 교사들에게 나누어주고 학생교육에 활용했는지 아닌지를 매월 점검하는 업무였습니다. 장부가 있어서 거기에 늘 확인 도장을 받았습니다.

명령과 지시와 통제 위주의 권위주의적인 교육 풍토, 비민주적인 교육 풍토 속에서 말없이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바르게 가르칠 수 없었고 민주주의를 학교에서 경험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살인적인 입시경쟁에서 낙오하지 않는 일만이 강요되었습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발견하고, 의문을 가져보고, 토의하고, 창조하고, 응용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주어진 내용을 암기하게 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든 아니든 그저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는가가 평가의 핵심이었습니다. 자율학습 보충수업이란 이름으로 교사와 학생을 지치게 하고, 길들이고, 통제하는 이런 단순하고 획일적인 교육은 개선되어야 합니다. 창의적인 방법, 질 높은 수업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겨울이면 수십 년 전에 쓰던 난로를 그대로 쓰면서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추운 교실, 교사의 법정 정원수를 확보하지 못해 한 교사가 몇 과목씩 가르쳐야 하는 현실을 그냥 둔 채 교사 몇몇만 쫓아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이 나라의 미래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40, 50년 전 아니 70, 80년 전부터 허용되어 온 교원들의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관계기관 대책회의나 제자뻘 되는 젊은 무술경관들의 곤봉과 구둣발에 맡겨둔 채 의식화 교사라고 매도하고, 불법단체라고 몰아붙인다고 가라앉을 문제가 아닙니다.”

30분도 넘게 제가 이런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제 입장을 판사와 검사 앞에서 진술하는 동안 법정에 나와 계시던 아버지가 변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면회도 오시지 않던 아버지, 저와 부자간의 의를 끊겠다고 선언하신 아버지가 제 이야기와 방청객들이 보내는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제 편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해직교사 가족모임에 나가셨고, 교육부나 교육청 항의방문을 다니셨습니다. 성정이 불같고 격한 데가 있어서 몸싸움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투사가 되실까봐 속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밤새 울던 벌레도 풀 아래 눕고
아직 아무것도 눈뜨지 않은 고요한 새벽입니다.
저도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을 오래도록 꿈꾸어 왔습니다.

첫닭이 울고 새들이 때 묻지 않은 울음을
하늘 한쪽에 축복처럼 뿌리며
우리들의 영혼이 먼저 깨어
어지러운 꿈을 차곡차곡 개어 두고
세상 욕심도 눈뜨지 아니하여
순결한 기도가 숨결처럼 몸에 스미는
그런 아침 같은 세상을 꿈꾸어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빼앗기고 짓밟히고 몸을 묶이어
세상 한 귀퉁이를 잘라 지은 감옥에 갇히어도
용서가 받아들여지고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모두들 제 욕심에 불타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이보다 더 오랜 세월을 저는 이 험한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피 터지게 소리치고 목숨에 불을 뿌려도
자기 자신을 향해서 외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울음과 웃음을 꾸밈없이 나누는 세상을 그리며
길고도 오랜 세월의 한 중간쯤에
지금은 잠시 감옥에 있습니다.

- 졸시 <눈뜨는 새벽> 전문

결국 1심에서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1심 판결에 불복한 검찰에서 항소를 하여,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벌금 30만원 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결국 벌금 30만원 정도의 죄인데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했던 것입니다. 자동차 접촉사고를 내도 그 정도는 배상합니다. 지은 죄에 비해 과한 법적 처분을 했을 경우는 국가에서 그만큼 배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재판을 받을 때 저는 배상금을 국가에서 돌려받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판사는 “피고는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하고 판시하고는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옥살이의 기록은 오래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출옥한 다음해에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강연 초청이 있었는데 검찰에서 내보내 주지 않아 결국 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 때문에 같이 가기로 되어 있던 신경림, 염무웅 선생님도 못 가셨습니다. 그다음에도 베트남 문인들과 문학교류를 하는 행사에 참여하려 했더니 역시 검찰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서 애를 먹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는 일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자리가 나거나, 공적인 자리가 있어도 갈 수 없는 결정적인 하자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게 편했습니다. 시인으로 살아야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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