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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31 17:56 수정 : 2010.12.31 18:00

힘겹던 해직의 나날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
하나둘 막일을 하고
명절에는 굴비를 팔았습니다
기약없는 어려움에
발 끊는 이도 생겼습니다
벽 타고 오르는 이파리들 보며
함께 가자 마음먹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7

막상 해직이 되고 나니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해직된 교사들끼리 사무실에 모여서 함께 대책을 마련하기도 하고 같이 밥도 해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교사들은 마냥 사무실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씩 둘씩 발걸음이 뜸해져 가 보면 몰래 노동판에 나가 막일을 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통닭집이나 음식점을 내서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광주의 어느 선생님의 사모님은 파출부로 나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감옥 간 남편 대신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분도 계셨습니다. 충남의 어느 선생님은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을 하려고 나서는데 아이가 신발이 떨어졌다고 새 신을 사달라고 해서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천원짜리 한 장이 잡히더랍니다. 그 돈을 줄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사무실까지 나갈 차비가 없어 만지작거리다 아이를 달래서 그냥 학교에 보내고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내는 쌀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못 들은 체 해직교사 사무실로 나왔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정신적인 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똑같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전국 곳곳으로 강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주로 교사들이 주최하는 강연이 많았습니다.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에서 차비를 빼고 나머지는 사무실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강연하러 간 시간에 나머지 해직교사들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하나둘 막일을 하고명절에는 굴비를 팔았습니다기약없는 어려움에 발 끊는 이도 생겼습니다벽 타고 오르는 이파리들 보며함께 가자 마음먹었습니다


참교육물품이란 이름의 티셔츠나 가방, 양말, 손수건, 공책이나 편지지를 팔기도 했습니다. 이 물건들은 제법 팔리는 것 같았는데 돈이 크게 남는 건 아니고 참교육이란 이름의 브랜드가 국민들 속으로, 교사나 학부모·학생들 속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크게 기여를 하는 장사였습니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는 굴비를 팔기도 했습니다. 주문받은 굴비상자를 학교로 배달하기 위해 차에 싣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드나들었습니다. 비린내 나는 굴비두름을 들고 학교 언덕을 오르며 저는 ‘굴비를 팔면서라도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현직교사들 중에 후원회비를 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평균 이십만원에서 삼십만원 정도를 해직교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곤 했습니다. 그 돈으로도 한 달을 살고 웃으며 사무실에 나오고 학교를 방문하고 이 나라의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는 해직교사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곤 했습니다. 대단한 분들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언제 끝날지, 언제쯤이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정세와 전망을 내다보는 이들은 2, 3년만 참으면 가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가 되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변해가면서 견디기 힘들어 하는 동료 해직교사들 중에는 하나씩 둘씩 발을 끊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힘겹던 해직의 나날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가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할 게 아니냐?” 하고 말했더니 “그런 희망 너나 만들어!” 하고 전화를 끊는 이도 있었습니다. 대책회의라는 걸 수도 없이 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집회도 하고, 항의 방문도 하고, 행정소송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고 해서 수없이 논의를 하고 의견을 모으면서 해직의 날들을 꾸려갔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회의 중에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나 혼자 살 길 찾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회의를 해 봐야 뾰족한 수도 찾아지지 않고 이것이다 싶은 정답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혼자 살 길 찾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내겐 수백만의 독자가 있는데 그들이 원하는 글을 쓰면서 살면 경제적으로는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계산을 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답답해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옆 건물 벽에는 담쟁이가 가득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저 담쟁이는 벽에 살면서도 저렇게 푸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보니 담이란 곳은 흙 한 톨도 없고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곳이 아닙니까. 저런 데서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어린 담쟁이는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주위엔 산도 있고 숲도 있고 비옥한 땅도 널려 있는데 왜 우리만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원망만 하고 있었다면 담쟁이는 말라죽었을 겁니다. 원망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 거지요.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붙들고는 있었던 거지요.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지요. 나도 힘들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이파리들도 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저렇게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거겠지요. 자기만 살길 찾겠다고 백 발짝을 달려가지 않고, 백개의 이파리들과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는 거겠지요. 정말 견딜 수 없이 힘든 날도 있지만 말없이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저는 벽에 살기 때문에 성장의 속도가 늦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텐데도 그 어려움을 과장하거나 떠들어대지 않고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이파리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며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거겠지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저는 회의 서류 뒷면에다 연필로 조그맣게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졸시 <담쟁이> 전문

그리고, 그래서,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 살길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함께 손잡고 이 어려운 벽을 헤쳐 나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반드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힘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가면 됩니다. 피 흘리고 희생을 하며 싸워서 벽을 넘는 길입니다.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한 시대의 벽을 넘어가는 때도 있습니다. 영웅이 나타나거나 위대한 과학자나 의학자가 나타나서 벽을 넘게 해 주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멀리 우회해서 가는 길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혁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구원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나날의 일상에서 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벽을 벽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담쟁이처럼 벽을 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7월30일 어느 일간지에서 직장인 백삼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내 인생에 꼭 간직하고 싶은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설문조사였답니다. 그 설문조사에서 <담쟁이>가 1위를 했다고 누가 연락을 해 주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에 1위가 어디 있고 2위가 어디 있습니까? 언제부터 이 시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직장 들어가기도 힘들고 직장생활 하는 것도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위안과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인생의 벽을 만났을 때 이 시를 썼고, 내가 쓴 시에서 내가 위안을 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지나올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도 자기 생의 벽 앞에서 이 시를 읽고 힘을 얻는다니 그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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