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겹던 해직의 나날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
살길이 막막해
하나둘 막일을 하고
명절에는 굴비를 팔았습니다
기약없는 어려움에
발 끊는 이도 생겼습니다
벽 타고 오르는 이파리들 보며
함께 가자 마음먹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7
막상 해직이 되고 나니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해직된 교사들끼리 사무실에 모여서 함께 대책을 마련하기도 하고 같이 밥도 해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교사들은 마냥 사무실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씩 둘씩 발걸음이 뜸해져 가 보면 몰래 노동판에 나가 막일을 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통닭집이나 음식점을 내서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광주의 어느 선생님의 사모님은 파출부로 나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감옥 간 남편 대신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분도 계셨습니다. 충남의 어느 선생님은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을 하려고 나서는데 아이가 신발이 떨어졌다고 새 신을 사달라고 해서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천원짜리 한 장이 잡히더랍니다. 그 돈을 줄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사무실까지 나갈 차비가 없어 만지작거리다 아이를 달래서 그냥 학교에 보내고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내는 쌀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못 들은 체 해직교사 사무실로 나왔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정신적인 고통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똑같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와 전국 곳곳으로 강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주로 교사들이 주최하는 강연이 많았습니다.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에서 차비를 빼고 나머지는 사무실에 내놓았습니다. 내가 강연하러 간 시간에 나머지 해직교사들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살길이 막막해하나둘 막일을 하고명절에는 굴비를 팔았습니다기약없는 어려움에 발 끊는 이도 생겼습니다벽 타고 오르는 이파리들 보며함께 가자 마음먹었습니다
참교육물품이란 이름의 티셔츠나 가방, 양말, 손수건, 공책이나 편지지를 팔기도 했습니다. 이 물건들은 제법 팔리는 것 같았는데 돈이 크게 남는 건 아니고 참교육이란 이름의 브랜드가 국민들 속으로, 교사나 학부모·학생들 속으로 퍼져 나가는 데는 크게 기여를 하는 장사였습니다. 설이나 추석 명절에는 굴비를 팔기도 했습니다. 주문받은 굴비상자를 학교로 배달하기 위해 차에 싣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드나들었습니다. 비린내 나는 굴비두름을 들고 학교 언덕을 오르며 저는 ‘굴비를 팔면서라도 비굴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현직교사들 중에 후원회비를 내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평균 이십만원에서 삼십만원 정도를 해직교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곤 했습니다. 그 돈으로도 한 달을 살고 웃으며 사무실에 나오고 학교를 방문하고 이 나라의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는 해직교사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곤 했습니다. 대단한 분들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언제 끝날지, 언제쯤이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정세와 전망을 내다보는 이들은 2, 3년만 참으면 가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가 되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변해가면서 견디기 힘들어 하는 동료 해직교사들 중에는 하나씩 둘씩 발을 끊는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
힘겹던 해직의 나날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졸시 <담쟁이> 전문 그리고, 그래서,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 살길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함께 손잡고 이 어려운 벽을 헤쳐 나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반드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힘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가면 됩니다. 피 흘리고 희생을 하며 싸워서 벽을 넘는 길입니다.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한 시대의 벽을 넘어가는 때도 있습니다. 영웅이 나타나거나 위대한 과학자나 의학자가 나타나서 벽을 넘게 해 주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멀리 우회해서 가는 길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혁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구원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나날의 일상에서 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벽을 벽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담쟁이처럼 벽을 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7월30일 어느 일간지에서 직장인 백삼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답니다. ‘내 인생에 꼭 간직하고 싶은 시 한 편을 써 달라’는 설문조사였답니다. 그 설문조사에서 <담쟁이>가 1위를 했다고 누가 연락을 해 주어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에 1위가 어디 있고 2위가 어디 있습니까? 언제부터 이 시를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직장 들어가기도 힘들고 직장생활 하는 것도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위안과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시를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나는 내 인생의 벽을 만났을 때 이 시를 썼고, 내가 쓴 시에서 내가 위안을 받으며 어려운 시절을 지나올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도 자기 생의 벽 앞에서 이 시를 읽고 힘을 얻는다니 그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도종환 시인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