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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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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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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골단 몽둥이가 날아들고
권 선생 머리에선 피가 흘렀습니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동안
저들은 군가를 불렀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점심때쯤 학교를 가는 겁니다. 오후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다른 학년 아이들이 공부하는 창 밖에서 가방을 풀지 못한 채 서성이거나, 어떤 날은 차가운 골마루에 올망졸망 쪼그리고 앉아 빗소리와 선생님 말소리가 뒤섞이는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들어갈 교실이 없고 / 나는 돌아갈 학교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알록달록 아름다운 자기 교실이 없고, 나는 싱그러운 아침 인사를 나누며 들어갈 학교가 없었습니다. 새 학기 개학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우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분주하게 오가며 입학식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돌아갈 학교가 없는 우리들은 교육부가 올려다보이는 길바닥에 앉아 학교로 돌아가야겠다고,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새로 만난 얼굴들을 익히느라 설레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침부터 백골단과 방패의 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싸워서라도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는데 몽둥이가 날아왔습니다. 구둣발과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싸움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는 거라고 알려주듯이 머리채를 휘어잡아 닭장차에 구겨 넣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앉을 자리를 정해주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경찰서 유치장이 아니어서 우리는 다시 싸웠습니다. 맞아 쓰러지며 싸웠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비록 신문지 한 장을 덮고 자더라도 옆 사람의 어깨를 해진 모포로 덮어 주며 그의 고통을 위해 마음을 썼습니다. 담배봉지를 모아 그 위에 결의문을 쓰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비굴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봄비가 내렸습니다. 상처 위로 떨어진 빗줄기가 살 바깥에 있는 아픔을 살 안까지 저리게 끌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 빗줄기가 봄 풀 위에도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처 위에 내리는 빗물이 풀잎 위에도 내리고 / 나무 끝에도 내려 /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 그림자를 지우면서 / 들을 건너가는 것”(졸시 <어떤 싸움> 중에서)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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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른 소리들이
하나씩 피 묻은 언어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평일 같으면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을 시간입니다
저토록 청명한 하늘을 내다보며 깔깔거리고
때론 아이들과 가을 노래라도 한 소절 불렀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방패에 찍히고 있습니다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있습니다
비록 학교의 밖에서나마 우리가 꺾이지 않고 살아
학교의 안을 하나씩 고쳐 가고자
우리가 끼인 팔짱 우리가 지르는 외침들이
하나씩 도막나며 끌려가고 있습니다
(…)
지금 저희 군화발에 이렇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언제쯤 땀과 피로 흥건해진 저희 앞에
물 한 모금으로 오시렵니까
저희는 이보다 더 모질게 짓밟힐 수 있습니다
더 더욱 단단하게 소리치며 맞아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쯤 이 피 묻은 눈물 위에
한 장의 손수건으로 오시렵니까
언제쯤 이 타오르는 불길 위에
마른나무 한 가지로 오시렵니까 - 졸시 <가투> 중에서 한번은 가두시위의 맨 앞에서 펼침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할 때였습니다. 집회 장소인 공원에는 이미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경찰 대치선까지 다가가 몸을 부딪치면서 옆에 있던 권영국 선생이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경찰의 곤봉이 권 선생의 머리 위로 날아왔습니다. 권 선생의 머리 위에선 피가 솟구쳤고 권 선생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습니다. 나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피 흐르는 권 선생의 머리를 감쌌고 손수건은 피에 흥건히 젖었습니다. 경찰들은 머리를 움켜쥔 권 선생에게 야수처럼 달려들어 끌고 갔습니다. 집회가 몸싸움과 함성과 비명에서 소강상태로 바뀌는 시간에 우리는 권 선생이 걱정되어 경찰서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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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찾아갔다 닭장차를 탔다
치료를 해주고 있는지 철창 안에
갇혀 있는지 묻다가
흉악범처럼 팔을 잡히고 팔다리를 들리어 닭장차에 실렸다
왜 우리가 연행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묻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가를 불러댔다
책임자가 누구냐 이것이 민주주의냐 물어도
그들은 지시에 따라 군가만을 불러댔다
이 한 목숨을 조국에 바친다고도 불렀고
충성을 다하리라 하고 부르기도 했다
군가가 끊기는 사이마다 철창을 두드리며
거리의 시민들을 향하여 우리가 애타게 외쳐대기가 무섭게
그들은 어머니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시내를 빠져나와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들판이나
변두리 파출소에 삼삼오오 흩어 팽개치며
황급히 그들은 떠났다
계급장이 없는 군복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군복의 땟물을 감추며
그들은 또다시 차를 타고 떠나며 군가를 불러댔다
사나이 한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외치며 그들은 달려갔다
그들의 조국 그들의 목숨에 대하여 물어볼 새도 없이 그들은 떠났다 - 졸시 <닭장차 안에서> 전문 도시 변두리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의 거대한 산 아래에 버려두고 떠나는 적도 있었습니다. 차비가 없는 날은 거대한 폐허와 악취의 산을 빠져나와 시내까지 걸어와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야만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런 폭력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권 선생은 나중에 십 년 만에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몇 해 전 세상을 떴습니다. 방학도 쉬는 날도 없이 학교에 나와 과학영재 아이들을 가르치고, 실험하고, 기뻐하는 동안 몸 안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고, 결국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들 곁에 있지 못하고, 그들 곁을 떠나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습니다. 나는 아직도 권 선생의 머리를 감쌌던 피 묻은 손수건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제 책상 맨 아래 서랍에 작게 접어 넣어두고 있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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