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1 21:16
수정 : 2011.01.21 21:16
사별 6년 되던 늦가을에
의롭고 좋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독자들은 돌아섰고 이어진 비난…
아내의 상처는 깊어갔습니다
기쁨과 아픔, 명예와 시련 다 주신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해직 된 이듬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습니다. 20년 만에 내리는 폭설이라고 했습니다. 그 겨울 저는 다시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가슴속 빈방을 쳐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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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 졸시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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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크고 아프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조용히 사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의 하나인데, 제 마음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 그루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졸시 <눈 내리는 벌판> 중에서)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해 겨울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언니의 심부름이라며 해직교사들의 사무실에 후원회비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언니는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활동을 하는 교수이면서 저희를 앞장서서 돕고 있는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논문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잠시 귀국한 상태였습니다. 전공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집합행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거리의 교사로 떠돌며 고생하는 것도 다 ‘집단행동/집합행동’ 때문인데, 그게 전공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도 동갑이라서 편하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늘진 데가 많은 사람인데, 그녀는 성격도 밝고 솔직하고 소탈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기 손으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공연히 어깨에 힘주고 폼 잡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몇 번 만나보니 의롭고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1년, 사별 후 6년째 되던 해 늦겨울 그녀와 다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어느 신문에서는 1면 전체를 제 결혼 이야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시인 도종환 여교수와 재혼’이라고 주먹만한 글씨로 제목을 달았고 사진도 대문짝만하게 실었습니다. 아내는 대학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도 대학교수가 된 건 아니고 여성운동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여성민우회’ 활동을 했고 ‘여성의 전화’와 ‘성폭력상담소’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등을 지역에 만들어서 봉사를 하며 일했습니다. 지금도 지역의 ‘여성정책개발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재혼했다더라’, ‘여교수와 결혼했다더라’는 말이 신문잡지를 통해 퍼져 나가면서 시집이 헌책방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당신 시집 오늘 불태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강연을 가면 다 듣고 난 뒤에 ‘그런데 어떻게 다시 결혼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습니다. ‘강연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실망했다는 말을 하러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독자들은 자기가 시집을 읽은 시점을 중심으로 계산을 해서 ‘내가 그 시집을 읽은 게 작년인데 어떻게 올해 재혼할 수 있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린 게 몇 달 되지 않았는데 다시 결혼을 했단 말이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실망의 말과 비난과 욕을 다 듣고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망을 하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다 제 시집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시집을 내다 버리고 제 이름을 기억에서 지우면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질 시집이면 잊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냉정하게 평가받을 필요도 있었습니다. 백만 명의 독자를 가졌던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정으로 몇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시집인지, 오래 남을 수 있는 시집인지 아닌지 검증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허명을 유지하기 위해 혼자 외롭게 사는 것처럼 하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명성이 계속 수입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슬픈 얼굴을 한 시를 계속 쓰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길은 그 길이 아니었습니다. 의롭게 살 수 있는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 시대가 젊은 우리에게 맡긴 책무를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듯 이 땅의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는 일 또한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문학의 포즈를 유지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어린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갖게 해 주는 일은 더 크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엄마’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올 수 있게 하는 일은 내 이름을 지키는 것보다 몇 배 더 값진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먹었지만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힘들고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출판시장의 반응도 그랬습니다. 백만 부는 다시 오지 않았고 50분의 1, 100분의 1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강연회 같은 공개석상에서나 기자들의 질문을 받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앞세웠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속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남자의 특징이기도 하고, 많이 쑥스러워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을 얻게 한 저간의 정황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런 태도를 아내는 실망스러워했습니다.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사이의 괴리를 가까이서 접하며 느낀 실망감은 천천히 상처가 되어 쌓이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저대로 힘들고 아내는 아내대로 힘들어했습니다. 사실 제가 힘든 것보다 더 힘든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제 옆자리, 저와 함께 있는 자리 그 자체가 저보다 몇 배 힘든 자리였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했습니다.
잘해보려고 했지만 한번 실망한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어느 단체에서 평등부부상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은 적 있는데 제가 먼저 거절했습니다.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안일이든 가사노동이든 남자들이 뭘 좀 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누리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평등한 자세로 살아 보려고 하지만 남자로 살아오며 삼사십년 몸에 밴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데가 많고,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근본적으로 남자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습니다. 환호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습니다. 찬란하던 순간도 있었고 허망한 시간도 있었습니다. 햇살과 그늘은 수시로 얼굴을 바꾸었고, 울창해 보이던 숲도 한순간에 폐허가 되곤 했습니다. 생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좌절과 시련과 고난을 주는 분이 영광과 명예와 환호를 주었던 바로 그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도 재능도 명예도 재물도 지위도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잠시 제게 맡기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도 문학도 성공도 그분이 주는 만큼 받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신 분이 그분이기 때문에 다시 되가져가겠다고 하면 기꺼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쌓은 것도, 내가 지니고 있는 것도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순명의 언어가 내 문학의 한계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이 많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까지도 내 문학입니다. 그 무렵 이런 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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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 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 날 몇 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이 오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 졸시 <당신은 누구십니까> 중에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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