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28 18:56
수정 : 2011.01.28 18:56
해직교사 복직 촉구 무기한 단식
예비단식서부터 열하루째 되는 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차 안
어느새 나이 사십…눈물이 흘렀습니다
김선생님이 쥐여준 대추 한 줌이
방한복 주머니에서 때굴거렸습니다
해직되고 난 뒤에 강연도 많이 다녔습니다. 전국의 시·군을 거의 다 다니다시피 하며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데마다 강연장 입구나 길을 형사, 장학사, 교장, 교감 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길목마다 서서 교사나 학생들이 강연을 들으러 오지 못하게 막거나 돌려보내곤 했습니다.
경기도 이천에선 강연 시작 전에 갑자기 행사장 주인이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강연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배선도를 보여주거나 어디가 안 들어오는지 알려주면 그쪽을 다시 연결하거나 일부를 차단해서라도 불이 들어오게 할 수 있다고 하자, 사실은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다고 하면서 나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인근의 교회로 급하게 옮겨 강연을 하였는데 1천3백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들어가기엔 교회가 너무 좁아 2백 명 정도는 교회 안에서 듣고, 나머지 백 명 정도는 밖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서 강연을 듣고, 1천 명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남양주에서는 강연을 하는 중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습니다. 방해하는 측에서 전기를 끊은 것입니다. 모두들 당황하고 있는데 잠시 후 교사들이 발전기를 들고 들어와 전기를 돌렸습니다. 혹시 이런 사태가 생길지 몰라 미리 준비해 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중들은 환호했고 다시 강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교육청 차원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강연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충남 청양처럼 행사 직전에 취소를 하는 곳도 있었고, 강연을 듣고 난 사회단체 인사들이 ‘이런 문학 강연조차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면서 도리어 지역주민과 교사들이 힘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학생들도 많이 왔는데 걸린 학생들은 다음날 학생과에 붙들려가서 체벌을 당하곤 했습니다. 강연을 들었던 고창의 강호상고 여학생 중에는 세 명이 정학처벌을 받았었다고 당일 강연장에서 시낭송을 했던 현 작가회의 사무처장 김근 시인(당시 고창고등학교 2년)은 이야기해 줍니다. 제 강연 들으러 왔다가 징계 받은 여학생들이 누구인지 지금 만날 수 있으면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주일에 세 지역 정도를 다니며 강연을 하였으니 일 년이면 백오십 곳을 다니는 강행군이었습니다. 무너질 뻔한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단식 투쟁도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촉구하는 전교조 대표단의 무기한 단식농성에 충북에선 제가 지부장으로서 참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목숨 걸고 하자는 단식투쟁이었습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단식농성이므로 미리 예비단식부터 해야지 건강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하시는 분이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 끼 식사를 두 끼, 한 끼로 줄여나가고 밥을 죽으로 바꾸면서 예비단식을 하였습니다. 서울에 모여서 단식투쟁을 시작하기로 한 날 저는 이미 일주일째 예비단식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모인 이들 중에는 내일부터 굶게 되니 오늘 저녁에 많이 먹어야 한다며 삼겹살집으로 가자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면 몸 다 버린다고 안 된다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선생이 오늘 저녁 실컷 먹은 사람과 저처럼 예비단식을 한 사람 중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 보자고 하면서 고기집으로 몰려갔습니다. 저는 무기한 단식농성에 대해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대로 방관하는 지도부가 미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이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농성이 아니라 정부종합청사에서 각 당사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를 찾아가서 집회도 하고 항의방문이나 면담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는 단식농성이었습니다. 일주일이나 예비단식이라는 이름으로 굶은 채 찬바람 부는 거리를 걸어 교육부나 정당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면 몸은 바로 주저앉았습니다. 돌아와 농성장에 앉아 있으면 숙변제거 하는 마그밀을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숙변제거란 이름의 설사를 하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무지막지한 단식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단식농성 나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예비단식을 시작한 날로부터 열하루째 되는 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같이 농성하는 이들은 그것 보라고 잔뜩 먹고 농성을 시작해야 한다니까 반대하더니 나흘 만에 쓰러졌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함께 농성하는 동료들의 강제조처로 사당의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단식농성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오는 차 안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느새 나이가 사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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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가
단식농성장에서 병원으로 실려 오는 차 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나이 사십에
아름다운 세상 아, 형벌 같은 아름다운 세상
-졸시 <단식>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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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검진 결과 위출혈이 있어 4주 이상 치료가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단식을 잘 하면 위장병도 고친다고 했는데 저는 그만 덤터기를 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평소 몸도 썩 건강하지 못한 허약체질인데 그만 입원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병원에 누워 있다가 방한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대추가 한 주먹 손에 잡힙니다. 단식농성 중에 서울의 김아무개 선생이 먹으라고 준 대추였습니다. 옛날 나무꾼들이 나뭇짐을 지고 고개 넘어 나무 팔러 갈 때 대추 한 주먹 주머니에 넣고 먹으면서 가면 장에까지 갔다 올 수 있었던 근기 있는 열매라고 하면서 몰래 먹으라고 주머니에 넣어준 대추였습니다.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려면 이런 거라도 몰래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남들 단식 하는데 몰래 무얼 먹으려면 화장실이나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먹어야 할 텐데, 그걸 숨어서 먹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면서 단식을 한다는 게 제 자존심에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그냥 넣어둔 대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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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 있는 내게 다가와
몰래 하나씩 먹으라고
김선생이 손에 쥐어준
빠알간 대추 한 줌
함께 단식하는 동료들 생각에
차마 못 먹고
주머니에 넣어둔 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몸 못 가누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와 바라보는
얼어붙은 겨울하늘 위로
빠알간 대추 몇 알
-졸시 <대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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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은 시골에 묻혀 사는 고지식한 우리들보다 약은 데가 많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거나 이삼십 시간씩 논쟁이 끝나지 않는 회의를 하는 때가 있습니다. 합법화의 방식을 둘러싸고 참예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던 때는 앉은 채로 수십 시간씩 회의를 해야 했습니다. 한번은 옆자리에 있던 김아무개 시인이 한 두어 시간 안 보이다가 나타나기에 “어디 갔다 왔느냐?”고 했더니 영화 한 편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뒤통수를 딱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안건 1번 아직 안 끝났지?” 그러는 겁니다. 혼자 살짝 나가서 사우나를 하고 올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건 한 개를 앞에 두고 거의 용맹정진 하다시피 싸우고 있는데 슬쩍 빠져나가서 바람도 쐬고 오고 목욕도 하고 와서는 또 후반전 논쟁에 참여하는 겁니다. 아무 일에나 목숨 걸려고 하거나,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아무 것에나 전력투구하려고 대드는 게 아니라, 쉬면서 슬슬 하는 거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운동권 사람들도 서울 사람은 그렇게 약은 사람들이라는 걸 늦게서야 알았습니다.
시인, 그림 이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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