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04 18:01
수정 : 2011.03.0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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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투사 사이…힘겹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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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35
비겁해지지 않으려 온힘을 다했을 뿐…
이렇게 허약한 사람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였습니다
시 쓰며 민주화를 외치는 두 얼굴
사람들이나 저나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이 하나 되는 얼굴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지만 겨울이 가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이른 봄이었습니다. 노동법·안기부법 반대 투쟁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드는 어느 날, 천막을 나와 근처 목욕탕에를 갔습니다. 겨우내 성당 날바닥 천막에서 지내며 목욕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입니다. 혼자 천천히 걸어서 목욕탕을 가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몇 달간 혼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 걷는 시간이 찾아온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시간도 좋았고, 몸을 씻고 나와 산뜻해진 마음으로 길을 걷다가 길가에 봄나물을 팔러 나온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이란 결국 이런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싸움, 투쟁, 한동안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센 바람 몰아치는 태백산 정상에서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바람과 맞서는 주목처럼 그런 자세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혹한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들꽃처럼 싸웠을 뿐입니다. 저는 성격상 투사가 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다만 비겁해지지 말자고 생각하며 있는 힘을 다해 싸웠을 뿐입니다. 나같이 여리고 허약한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들꽃들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
(…)
나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
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돌아보는 이 저녁에
- 졸시 <이른 봄> 중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고 말했지만 두려울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두렵지만 두려움을 이기려고 애를 쓴 거지요. 두려움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참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사람을 정말 새롭게 바꾸기도 한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도약하는 것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았고, 청춘을 다 바쳐 불의에 맞설 수 있었고, 연대가 무엇인지 알았으며, 희망이 왜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봄이 얼마나 고마운지 겨울을 혹독하게 겪고 난 뒤에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개나리꽃이 핀 봄날, 전교조 사무실 근처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다 생각해 보니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지가 여덟 해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놀이터에 개나리꽃이 진하게 피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가고 없고
아이들이 금 그어 놓고 놀다간
사방치기 그림만 땅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앞에 서서 폴짝 뛰어 보려다
멈칫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 폴짝 폴폴짝 뛰어 건넜다
개나리꽃이 머리를 흔들며
깔깔대고 웃다가 꽃잎 몇 개를 놓친다
햇살이 윗 꽃잎에서 아래 꽃잎 더미 위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여기서 오 분만 걸어가면
쫓겨난 학교가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못 돌아간 지 꼭 여덟 해가 된다
걸어서 오 분이면 가는 학교를
- 졸시 <어린이 놀이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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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투사 사이…힘겹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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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제게 시인의 이미지와 투사의 이미지가 함께 있는 게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서정적인 시인의 이미지로만 저를 보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운동권 후배 중에는 “아직도 시를 쓰세요?” 하고 묻는 이가 있어서 제가 더 놀라기도 했습니다. 후배들에게는 내가 전혀 시인처럼 보이지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이런 크고 거창한(?) 일을 하며 아직도 시 같은 것에 매달려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맑은 시를 쓰는 시인이 어떻게 전교조 지부장을 하고 감옥에 끌려가고 거리에서 집회를 이끌고 민주화운동을 하는지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일을 도모하면서 어떻게 이런 여리고 부드러운 시를 쓸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 두 가지를 아우르며 양쪽 일을 잘 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됩니다. 둘 중의 하나는 진정성이 결여되었거나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분들이 납득하고 이해할 만한 대답을 잘 찾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저같이 여리고 약한 사람도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았던 거지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에 수긍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투사로 살았다면 적어도 김남주 시인처럼 살면서 시도 확실하게 쓰거나, 여린 시인으로 살았다면 박용래, 천상병, 이성선 시인처럼 살았거나 아니면 시를 그만두거나 했어야 독자들이 혼란스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일급수에 살던 물고기도 아니고, 오염에 저항하다 죽은 물고기도 아닌 채, 5급수 탁류 속에서 허리가 휜 채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저희도 기형으로 살아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저희도 그 물 속에서 몸을 보전하고 시를 놓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길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충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더 맞겠지요. 시인의 길과 민주화운동 하는 삶, 두 길 모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운동하는 삶에서 문학이 우러나도 그 문학이 거칠거나 속되지 않고, 시를 쓰면서 민주화운동을 해도 그 운동이 나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으면서 두 길이 잘 조화를 이루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의로운 길을 가면서도 문학으로서의 품격도 갖추고, 시를 시답게 쓰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동시에 심성이 모나거나 거칠어지지 않게 지켜나가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시심의 바탕에는 선한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바탕이 깨끗하고 선하면 그 마음은 의로운 마음과 자연스럽게 통합니다. 선하기 때문에 자연히 의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의로운 마음이 옳은 일에 나서게 하는 겁니다. 아이들과 여성과 소외된 이들이 겪는 아픔,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에 동참하는 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서게 됩니다. 정의감이나 의로운 분노는 선하고 지순한 마음이 아니면 생기지 않습니다. 권력에 대한 탐심이나 명예욕, 자리에 대한 계산된 욕심을 가졌다면 그건 의로운 분노가 아닙니다. 의로움보다 이익에 치중한 마음이나 이해관계와 타산을 따지면서 무슨 일을 한다면 좋은 시가 쓰여질 리 없습니다. 여린 마음과 곧은 마음은 마음 밑바닥 깊은 곳에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의 외연만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이 서로 통하는 데가 없다면 우리의 자아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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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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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서도 부끄럽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도 반듯하게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도 시인의 심성을 유지하며 사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격이란 바위와 낭떠러지와 계곡과 모래언덕을 지나가는 물줄기처럼 길고도 먼 길을 한평생 유장하게 흘러가는 동안 형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의 길 역시 그렇게 한 생애를 다 던져서 완성해가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아직도 시인의 이미지와 교육운동, 민주화운동 한 사람의 이미지가 뒤섞여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두 얼굴이 잘 매치(match)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게 하나가 되는 얼굴을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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