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떠난지 10년만에 복직명령을 받았습니다
값지고 고마운 시간들이 마음 안에서 지나갑니다
대학에 사표를 내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해직생활 십 년 만에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 열렸을 때 지나간 십 년을 돌아보는 저의 심정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육운동, 노동운동을 하며 십 년을 보냈는데 운동가가 되었는가. 운동가, 혁명가의 길로 갈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보니 저는 체질상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의 길로 가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텔레비전 연설을 해 달라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전국구 의원이 되곤 했지만 저는 끝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낙선한 대통령 후보를 돕는 후원회 부회장 자리가 제게 주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매달 한 번씩 조찬모임이 있었는데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지방에서 조찬모임에 가려면 그 전날 올라가야 하는데 밤늦게까지 해야 할 일들이 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제쳐 놓고라도 권력교체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할 줄 아는 정치적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청와대와 권력의 핵심요직에 들어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자가 되는 길로 가지도 못하였습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던 해에 감옥에 끌려가는 바람에 공부를 거기서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몇 해만 참고 운동에 거리를 두었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다면 십 년간 많은 공부를 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비굴해도 조금만 참고 학교에 남았다면 십 년간 수천 명의 제자를 길러냈을 텐데 그만 제자 없는 거리의 교사로 떠돌고 말았습니다. 어려서는 화가가 되려다 그 길로 가지 못하고, 학자의 꿈도 중도에 그만두고, 혁명가도 아니고, 선생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가정에서는 자식 노릇 아비 노릇도 못하고, 그렇다고 훌륭한 시인이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틀이 멀다 하고 강연을 다니며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부르는 곳이면 달려가 그들의 모임이 활성화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십 년 동안 내가 한 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 기간에 작품을 갈고닦았다면 빼어난 작품 몇 편을 썼을 텐데 그런 작품을 쓰지도 못하였습니다. 열심히 살면 그렇게 산 만큼 좋은 글이 써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도 그렇게 쓰고 갈고닦는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다 잘하고 그걸 조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번은 평론가 김상욱 교수와 술을 마시다 “나는 본래 로맨티스트였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리얼리스트가 되었어.”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김 교수가 바로 받아서 “형은 지금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계몽주의자야. 그것도 애국적 계몽주의자!” 그렇게 말하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웃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십 년을 살고, 글을 쓰고 했는데, 저는 계몽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애국적 계몽주의자!’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습니다. ‘계몽이 뭐가 나빠?’ ‘시인이 결국 계몽주의자가 되고 만다면 문제 아니야?’ ‘무슨 소리야, 지금도 여전히 계몽이 필요한 시대야’ 이런 이야기를 열띠게 주고받는 이들 속에서 솔직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교조 교사라는 이름을 걸고 살아가고자 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참 많았지만 그게 서운하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해오면서 저는 제가 가진 능력과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이런 것들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겸손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고 남들이 모르는 결점이 많은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으며, 세상은 우리가 달라진 정도만큼 변하는 것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에 청춘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바쳐서 작은 것 하나를 이룬 경험 또한 얼마나 값진 걸 얻은 것입니까.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실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다. 그대는 옳은 일을 해야만 한다. 지금 당장 그 결실을 얻는 것은 당신의 능력 밖일지도 모른다. 더 나중의 시대에게 돌아갈 몫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 옳은 일을 중단해선 안 된다. 당신의 행동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얻어질지 당신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실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라는 간디의 말을 저는 믿습니다. 옳다고 믿는 일을 향해 온몸을 던져 실천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값진 일입니다. 행위의 결과가 우리에게 미칠 이해득실을 따지며 앉아 있는 일보다 옳다고 믿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십 년간 열심히 살았지만 좋은 시 한 편 제대로 못 썼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열심히 살려 했던 사실 자체에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무렵 지역에 새로 생긴 대학의 문창과 겸임교수를 하며 시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시골 중학교로 복직 발령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이만큼 애를 썼으니 그만 봉사하고 대학으로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문예창작학과가 여기저기서 생기던 때라 전라도 어디에 자리가 있는데 가볼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을 해 오시는 원로 시인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학교에 사표를 내고 시골 학교로 가기로 했습니다. 다시 나를 현장으로 하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그동안 내가 입으로 떠들던 교육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식과 제안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십 년간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싸웠으니 일관성 있게 처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데가 많은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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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가죽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졸시 <가죽나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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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소요유’ 편에 나오는 가죽나무 이야기에서 제목을 받아온 시입니다. 그렇다고 장자의 ‘무하유지향’의 무위자연을 지향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혜자가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가 없고, 길에 서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한 그 가죽나무처럼 저도 효용성만으로 보면 크게 쓸모가 없는 나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알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무라도 그 그늘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그 아래서 잠시 쉬어 가고 싶은 사람도 있다면 그를 위해 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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