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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01 20:22 수정 : 2011.04.01 20:30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39

반복되는 도벽과 가출…
3년을 함께 꽃재를 넘었지만
다시 소년원을 오간 그 아이가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 손이 또 뭘 할지 모르지만
객석의 저는 울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39

동완이를 처음 만난 것은 입학식 날 아침이었습니다.

“선생님, 얘 교복 없대요.”

낡고 찢어져 꾀죄죄한 파카를 입은 채 동완이는 현관에 서 있었습니다. 중학교 첫 입학을 하는 날, 터부룩한 머리에 집에서 입던 해진 옷을 그냥 입혀 학교로 보낸 부모는 누굴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졸업생 교복 한 벌을 구해다 입혔습니다. 동완이는 교복만 안 입고 온 게 아니었습니다. 공책도 없고 학용품도 없었습니다. 데리고 나가 공책과 연필 등 필요한 학용품을 사 주었습니다. 동완이는 학습부진아입니다.

그해 오월 초, 동완이 담임교사가 가정 사정으로 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담임을 맡겠다고 자원해서 동완이 담임이 되었습니다. 동완이는 집에서 학교까지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옵니다. 아침밥도 못 먹고 오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급식지원 대상자로 선정하고 학교에서 밥을 먹였는데 어떤 날은 세 그릇씩 먹기도 합니다. 왜 버스를 안 타고 걸어오느냐고 물었더니 버스표 살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한 대 사 주는 게 났겠다 싶어 자전거 가게엘 들렀다가 동완이 어머니가 농약을 먹고 돌아가신 뒤부터 점점 뒤떨어지는 아이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체육시간에 벗어 놓고 간 옷에 들어 있던 돈이 다 없어진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짚이는 게 있었습니다. 동완이 짓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불쌍하게 생각하고 돌보아 준 것에 대한 실망과 돈을 숨기고 내놓지 않는 것에 대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저는 매를 들었습니다. 매 한 대를 맞을 때마다 이 녀석은 돈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형사처럼 다그치고 때려서 훔쳐간 돈을 찾아낸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이 녀석한테 들인 공이 모두 다 헛수고였다는 생각 때문에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림 이철수
그동안 양말 없이 다니면 양말을 사 주고, 팬티와 러닝셔츠와 실내화를 사 주고, 운동화를 사 신기고, 머리를 못 깎고 오면 이발소에 데려가 머리를 깎아 주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점점 안 좋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들과 새벽에 구멍가게에 들어가 먹을 것과 돈을 훔치기도 하고, 거기서 훔친 담배를 피우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기도 했습니다. 가출이 잦았고 그때마다 동네의 돈이나 패물이 없어졌습니다. 초등학생인 동생과 함께 다녔는데 훔친 돈으로 먹는 걸 해결하고 잠은 마을회관 옥상이나 공설운동장 구석, 상가건물 지하, 아파트 보일러실 등에서 자면서 밖으로 떠돌았습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밖으로 떠돌던 녀석을 데리고 오면 냄새가 심해서 목욕을 시키고 겉옷을 벗겨 세탁소에 갖다주곤 했는데, 세탁소에서도 이 녀석 빨래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차츰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퍼부어도 퍼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일 뿐 하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동완이를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이지만 어쩔 수 없이 청소년 상담소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거기서 저는 동완이가 병적 도벽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상실한 사랑에 대한 대치 또는 잃어버린 모자관계의 회복이 도벽의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농약을 먹고 자살한 충격적인 경험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 무관심, 무질서한 가정환경,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 이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공격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해소할 길 없는 미움, 아버지로부터 받는 학대,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동완이는 도둑질을 하고 가출을 했던 것입니다. 병적 도벽의 경우 불안이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갔다가 도둑질을 끝내면서 해소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족 사이의 관계 회복과 유지인데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건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부모가 풀어주지 못하는 박탈감 소외감을 풀어주고 누군가 너를 아끼고 돌보고자 한다는 신뢰를 갖게 하는 일을 끝없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옷이 찢어지면 꿰매어주고 더러우면 빨래도 해 주고 몰래 도와주는 여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동완이는 그렇게 다정하게 제 말을 들어주고 정성스레 옷을 꿰매 주는 엄마 같은 선생님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시시포스의 신화에 나오는 형벌 받은 사람처럼 끝없이 바위를 정상을 향해 밀어 올리는 일. 동완이를 가르치는 일은 그 일과 같았습니다. 다 올려놓았다 싶으면 또 아래로 굴러떨어지곤 하는 바위를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고 걸어 내려가 바위를 밀기 시작하는 일, 교육은 매일 그런 일을 되풀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사들이 만원씩을 거두어 수학여행비를 마련해서 수학여행도 데려가고 옷도 사주고 저도 이 녀석을 포기하지 않고 졸업할 때까지 3년간 담임을 맡으며 아침저녁으로 차에 태워 꽃재를 넘어 다니며 등하교를 시켰습니다. 한번은 집에 가자고 하니까 가게에 들러 채소를 사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 있냐니까 이천원이 있답니다. 부족하면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엄마가 모자라면 선생님한테 달래서 사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야, 이놈아 너희 집 시금치 당근 사는데, 왜 내가 돈을 내!” 하고 소리치면서 웃었습니다. 가정방문 갔을 때 마당의 비닐하우스 안에 앉아 내다보지도 않던 엄마였습니다. 그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게 저는 고마웠습니다.

옛날에는 무슨 꽃이 피었을까

여름엔 키가 훌쩍 큰 수수가 자라고

가을에는 구절초 듬성듬성 피어 있는

이 고개에는 무슨 꽃이 가득했을까

다섯 살 때 농약 먹고 죽은 엄마 이 고갤 넘어간 뒤

바람만 건듯 불면 읍내로 나가

얻어먹기도 하고 훔쳐 먹기도 하면서

마을 회관 옥상에서도 자고 아파트 보일러실에서

자기도 하면서 제 자신을 팽개쳐야

바람이 잦아들던 동완이

아침저녁으로 데려오고 데려가며 삼 년을 넘던 고개

읍내에서 자장면 배달을 한다는 웅이와

먼 도시로 가 술병을 나르기도 하고

미용기술을 배우기도 한다는 가영이 남매

고개 넘어 사라질 때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지켜보던

은행나무 한 그루 아직도 서 있는데

조선족 새엄마 들어와 동생 둘을 낳는 동안

이 남자 저 남자 품에서 자며 자라는 열다섯 성화

제 아버지한테 잡혀와 머리를 홀랑 깎이기도 하고

죽도록 얻어맞기도 하다가 밤을 틈타 넘어간 고개

오늘은 억새풀만 하얗게 우거졌는데

옛날엔 무슨 꽃이 피어 있었을까

공장부지로 헐려나가고 까뭉개지기 전에는

무슨 꽃이 예쁘게 피어 꽃재였을까

- 졸시 <꽃재> 전문

그렇게 졸업시킨 동완이를 읍내 농업고등학교로 보내며 담임교사에게 잘 부탁한다고 전화했더니 그 선생님이 “우리 반에 그런 애들 많아요” 합니다. 얘만 특별히 신경 써 줄 수 없는 처지란 걸 압니다. 결국 동완이는 몇 년 뒤 다시 구멍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치다 소년원으로 갔습니다. 졸업한 뒤에도 동완이는 잊을 만하면 전화를 했습니다. 학교를 못 나가고 있다고,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가고, 여동생은 쉼터로 가고, 저희끼리 남아서 밥을 끓여 먹고 있다고, 일시보호실에 와 있다고, 한밤중에 빗속에서 시설을 탈출해 나왔는데 갈 데가 없다고, 면회를 와 달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달려갔습니다. 먹을 걸 싸들고 일시보호실로 갔고, 소년원을 찾아갔고, 부모 대신 법정에 서서 같이 재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동완이는 소년원에서 형기를 마치고도 로뎀청소년학교로 옮겨 6개월 동안을 더 생활해야 했습니다. 거기 있던 어느 날 저는 청소년학교로부터 연주회를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천시 야외음악당에서 열리는 푸른 음악회였습니다.

음악회 마지막 순서에 로뎀청소년학교 학생들이 나왔습니다. 동완이가 첼로를 들고 맨 가장자리에 앉아서 ‘사랑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울었습니다. 물론 남들보다 굼뜨고 서툴러 보였지만 그것은 제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밤에 잠긴 가게문 자물쇠를 몰래 따기 위해 드라이버와 연장을 들었던 손으로 악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남의 집 담을 넘고,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아무 데나 팽개치던 몸으로 첼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이제껏 남에게 손가락질만 받아 왔는데 박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동완이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고마웠습니다. 손이 뜨겁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손에 들었던 첼로를 놓고 동완이가 다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객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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