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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29 20:21 수정 : 2011.04.29 20:21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3

빈 밭처럼 나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강박과 의무감에서도 나를 풀었습니다
어리석음의 밀물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3

이 원장이 이야기하는 오링테스트를 따라 해보다가 재미있는 현상을 경험하였습니다. 처음엔 책에 있는 그림에 왼손을 대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붙이고는 손가락 끝에 힘이 모아지는가 힘이 빠지는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손끝에 힘이 세게 모아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딸기에 왼손을 대고 오른손을 폈더니 손끝에 힘이 모아집니다. 그러나 라면에 손을 댔을 때는 힘이 빠집니다. 다시 따듯한 보이차에 손을 댔더니 힘이 모아집니다. 신기하다는 생각에 책상 위에 있는 책에 손을 대보았습니다. ○스님 책은 힘이 빠지고 유영모 선생 책은 힘이 모아졌습니다. 제 시에 대해 좋게 쓴 평론이 특집으로 실린 문학지에 손을 댔더니 힘이 빠지는데, <생활성서> 부록에 손을 댔더니 힘이 모아집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함이 남아 있습니다. ○스님 책에서도 생활불교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유영모 선생 책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의문이 생기는데 아직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나타난 현상이 가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는 점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림 이철수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 왼손을 두 가슴 사이에 올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람마다 오른손 끝에 힘이 생기는 사람과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겉으로 생각하거나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부분과 다르게 나타나는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만약 오링테스트 결과를 그대로 믿는다면 겉으로 나타나는 친숙도와 내가 잠재의식 속에서 생각하는 친밀도가 다르다는 뜻일 겁니다.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증자(曾子)의 말입니다. “군자는 글월로 벗을 만나고 벗으로 인을 도운다”(以文會友 以友輔仁)에서 온 말로 <논어> ‘안연편’에 나옵니다. 박영호 선생은 “벗을 사귀는 것은 벗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보인(輔仁)을 위해서다” 이렇게 풀이합니다. 내가 진정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부족한 어진 마음을 채워줄 사람이라서 가까이하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철수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떠올랐는데…. ‘철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는 밤중에 이 원장의 책을 읽다가 책에 나오는 대로 ‘빛이 내린 토리노의 성의’ 사진에 손을 대고 오링테스트를 해보았습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기 전까지 수일 동안 몸을 덮고 있었던 마포에 사람의 얼굴 모양의 얼룩진 형상이 새겨진 것을 말합니다.

나는 먼저 내 몸의 아픈 부분 목과 기관지 근처에 왼손을 대고 내 기력을 재 보았습니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쥔 오른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음 토리노의 성의 사진을 바라보며 호흡을 여러 번 한 후 다시 오링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왼손을 토리노의 성의 사진에 대고 다시 호흡을 여러 차례 가다듬자 오른손에 힘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오른쪽 팔이 아래위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에도 찌릿찌릿한 기운들이 뻗치는 것이었습니다. 2004년 3월12일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기 수련을 하든, 종교적 수행을 하든, 지극한 심신 수양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장이 마치 신의 형상과 모습처럼 온전해지면 그 사람의 몸에는 강력한 생명 전류나 자기장이 형성되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고양되고 기 흐름이 조화로워져 이른바 영육의 거듭남과 환골탈태를 반복하는 힘겨운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명 파장의 환한 빛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생명을 잘되게 하며 사람에게서 ‘환한 빛’이 나도록 하는 그 어떤 힘(신성한 기운)이 존재한다. 그러한 힘은 우리 몸의 안과 밖에 동시에 기나 빛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힘(신성한 기운)의 원천이 곧 신이거나, 그 힘 안에 신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났습니다. 몸이 무거워 일어나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30분이나 늦게 일어났습니다. 세수를 하고 창 앞에 앉았습니다. 해가 이미 높게 떠 있었습니다. 명상을 시작하자 곧바로 진동과 몸 떨림이 왔습니다. 팔이 들려지면서 여러 차례 해를 향해 뻗는 동작, 양팔을 펼쳐 크게 원을 그리는 동작 등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몸 아래쪽이 심하게 들썩이며 들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천천히 손이 몸의 아픈 부위를 찾아가 두드리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랫배가 무엇으로 가득 차서 팽팽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단전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면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호흡이 깊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와 고요해지고 명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명상이란 말은 본래 중재(meditation)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중재가 둘 사이에 위치하여 양쪽을 조화시켜 큰 하나를 이루어 가는 화평의 길이라고 한다면, “오욕칠정이 꿈틀대는 겉사람 나(我)와 신성의 영혼이 깨어나려 하는 속사람 나(自)의 둘 사이를 중재하고, 이 땅의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나와 하늘의 별자리처럼 조화로운 질서를 좋아하는 나 사이를 중재하는 길이 명상”이라고 이 원장은 말합니다.

저는 명상 중에 이 두 개의 나의 조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신성의 나와 인성의 나, 영적인 나와 속된 나, 어진 나와 어질지 못한 일을 수시로 하며 사는 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길을 따라가다 멈칫거리는 나, 진정한 조화와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바위 위에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고요 속에서 나도 없고 생각도 없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냥 멈추어 있었습니다. 빈 밭처럼 나를 내버려 둘 때도 있었습니다. 갈지도 않고 일구지도 않고 씨를 뿌리거나 농사를 짓지도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이 흙의 몸속에서 계속 무언가를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도 밭을 풀어주고, 의무감에서도 나를 놓아주자고 생각했습니다.

화엄의 숲에서 나와 해인의 초막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무가 되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고 그 숲 안에 대동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지난 몇십 년 가슴 벅차고 힘들고 기뻤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가고 있었습니다. 해인(海印). 바닷물에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까지 다 비쳐 해인이려면 풍랑이 가라앉아야 합니다. 번뇌의 물결, 지나친 욕심의 파도, 끝없이 밀려오는 소유에 대한 집착, 헛된 명예와 허영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의 밀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요하고 고요해진 바다에 맑은 내 얼굴이 초승달처럼 비칠 때 그 해인의 삼매에서 다시 화엄의 세상을 향해 몸을 돌려야 합니다. 본래 화엄의 큰 눈을 뜨기 직전 가장 깊은 순간이 해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해인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 병든 몸으로 화엄의 문을 열고 나와 해인을 향해 길을 나섰으나 해인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산중턱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해인과 화엄의 중재, 그게 어떻게 결론을 낼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고요 속에 남루한 정신과 병든 육신을 맡긴 채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람이 맑게 씻어주고 부드럽게 매만져 줍니다. 햇빛이 내려와 제 안을 가득 채우고 따듯하게 합니다. 바람 속에 햇빛 속에 그냥 고요히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림 이철수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에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소리 바람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 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해인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지친 육신을 바랑 옆에 내려놓고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지금은 바닥이 다 드러난 물줄기처럼 삭막해져 있지만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 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졸시 <해인으로 가는 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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