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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6 20:19 수정 : 2011.05.06 20:19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4

“내가 무얼 잘못했나” 하는 생각은 부질없었습니다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고요히 보내는 시간과
읽고 사유하는 시간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4

산속에서 제가 처음 만난 것은 삭막함이었습니다. 처음 산에 들어올 때가 삼월 초였는데 겨울의 끝자락이 산 전체를 덮고 있는데다, 아직 어떤 나무도 푸른 잎을 낼 엄두를 못 내고 있어 사방은 잿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적막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있는 저를 삭막함과 적막이 먼발치서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로부터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관계하던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아야 했습니다.

힘과 활기를 주시던 하느님은 병과 쇠락을 주셨고, 수많은 일과 크고 무거운 과제와 그걸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던 하느님은 무기력과 나약함과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영광과 박수와 찬란함을 주시던 분이 그늘과 적막과 잊혀지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만개하던 꽃은 흔적도 없이 지고, 빛의 시간은 어둠의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몸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았고 고난의 시간도 수없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위안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던 분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드신 걸까?’ ‘왜 이렇게 버리시는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 ‘무슨 이유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림 이철수

그러다 욥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욥은 하느님이 사탄의 도전을 받고 의로운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기로 결정했을 때 불운하게도 가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재산을 다 잃습니다. 그러자 욥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욥을 더 시험하기 위해 욥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역겨운 종기로 뒤덮이도록 합니다. 그러자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깨진 옹기 조각으로 종기를 긁으며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욥의 아내도 욥에게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때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느님한테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필립 시먼스는 이 대답에 대해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지만 하느님을 선과 사랑의 하느님으로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기도를 하면 항상 밝은 광명 쪽으로 돌아서는 사람들, 영적 경험 속에서 오로지 달콤함과 조화만 찾는 사람들에게 욥은 더욱 준엄하고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욥은 하느님이 선과 악의 하느님, 빛과 어둠의 하느님, 상냥하고 냉혹한 하느님, 조화와 불화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코란에 나오는 ‘라 일라하 일 알라후’라는 구절이 탄생과 죽음, 기쁨과 고통, 젊음의 활기찬 분출과 노년의 느린 쇠퇴, 밥과 똥, 가장 감미로운 노래와 고통의 비명도 모두 신에게서 나온다는 말인 것처럼 ‘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일까?’ 이런 생각도 부질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느님, 당신도 보셨지 않습니까?’ 이런 항변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저 가만히 고통의 시간 앞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비지심(是非之心)도 분별지(分別智)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일, 내가 싸우며 지키려고 했던 가치,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벼르던 모순, 제도, 집단, 올해 안으로 써야 할 책, 마감일을 지켜야 하는 원고,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모임, 나를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 명예, 사랑 이런 것들도 하느님이 보시기엔 하찮은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한순간에 내팽개쳐질 수 있고, 단절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오만한 것입니다. 내 명성도 내 재산도 내 시도 사랑하는 사람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무한정 쓸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주신 분이 가져가겠다고 하면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만 거두어 가야겠다고 결정하시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걸 받아들일 때 “쓰러뜨리신 분도 그분이시니 일으켜 세워주실 분도 그분이시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맡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질병, 어떤 재난, 어떤 사고, 어떤 실패,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은 갑자기 전복될 수 있고 느닷없는 추락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필립 시먼스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의 추락(falling)을 경험했으며,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젊은 꿈의 상실, 체력의 저하, 희망의 좌절, 가깝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림, 그리고 언젠가는 닥쳐올 종말, 우리는 추락을 선택할 수도 없고, 그게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에고(ego)를 버리고,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과 소중한 자아를 내버립니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추락할까요? 열정 속으로, 공포 속으로, 터무니없는 기쁨 속으로 떨어집니다. 겸손 속으로, 연민 속으로, 공허 속으로, 우리 자신보다 훨씬 큰 힘과의 조화 속으로, 우리처럼 떨어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 속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스러운 존재와 직면하게 됩니다. 신성, 신비,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한 우리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게 됩니다.”

느닷없는 추락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겸손과 연민과 공허를 지나 어떤 큰 힘과의 조화를 통과하여 마침내 신성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만난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본성,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면 고통과 추락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통과 질병을 만난 시간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통의 시간, 추락의 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저는 사십대 후반에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병을 만나 주저앉아야 했습니다. 십년 만에 복직을 하면서 앞으로는 좋은 일, 기쁘고 희망차고 보람 있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습니다.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병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몇 년씩 산속에 들어앉아 혼자 고요히 보내는 시간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아프지 않았다면 어떻게 읽고 사유하고 쓰는 시간을 삼년씩, 오년씩 가질 수 있겠습니까? 몸에 병이 찾아온 것이야말로 복 받은 것이구나 하고 바꾸어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축복받은 시간이라고 생각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가난, 외로움, 좌절, 절망, 방황, 해직, 투옥, 시련, 고난, 질병 이 모든 것들이 다 고마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저는 다른 길을 갔을 것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축복>이란 시를 쓰게 된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그림 이철수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졸시 <축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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