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27 21:49
수정 : 2011.05.27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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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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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만에 생긴 인세 다 기증해도
아내는 말없이 지켜봐줬습니다
학교가 문연 날 교장선생님은
가장 달라진 건 마음이라고…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7
저는 스콧 니어링을 좋아했지만 그처럼 살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은 노동하고, 네 시간은 좋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며 보내고, 네 시간은 지적인 활동을 하며 사는 삶. 그런 삶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평화주의자이며 채식주의자인 그의 모습을 흉내내보고 싶었지만 철저한 베지테리언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사회주의자로 살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사회의 주류 우파로부터도 쫓겨났지만, 나중에 미국공산당으로부터도 제명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착취를 차단하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광적인 경쟁을 줄여가며, 착취와 경쟁 대신 협력을 바탕으로 소박하고 창조적이며 유익하고 아름답게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는 폭정과 전제정치와 족벌주의와 소수지배를 끝내고 국민의 주권을 옹호·확대하며, 냉혹한 생존 투쟁과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고 인도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일이 우리의 과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든 행위를 고귀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분별력과 지혜를 추구하고 진실되게 보고 느끼며 당당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자비를 베풀고 정의를 확립하는 데 힘쓰고자 했습니다. 그는 재력가가 그에게 남긴 유산을 정중히 거절했고, 800달러를 주고 산 공채가 6만달러까지 올라가자 공채증서를 난로 속에 넣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진보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고, 100살까지 살다가 평화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으며 충만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숲에 들어가 산 지 세 해째 되는 2006년 <해인으로 가는 길>이란 시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시집을 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몇 해 만에 처음으로 인세수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인세를 어떻게 쓸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때 마침 충북민예총이 베트남과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학생들이 교실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학교 건물을 지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화가, 서예가들이 나서서 전시회를 열고, 음악인들이 공연을 해서 학교건립기금을 모으고 있었는데 일 년 동안 모은 돈이 1200만원이었습니다. 학교를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가난한 예술가들이 애써 마련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진척이 안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인세를 학교 짓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몇 해 만에 생긴 목돈을 다 주어 버리면 어떻게 생활하려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내는 말없이 지켜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할 때 내게 제일 중요했던 걸 주는 게 진짜 남을 돕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책임을 맡아 운영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로 인해 생기게 될 인세 전액을 기증해서 돈이 제 통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베트남 학교 짓는 경비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인세만 가지고는 부족할 것 같아서 출판기념회라는 이름의 모금행사를 해서 기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학교 건물이 어느 정도 지어졌는지 확인할 겸 베트남 푸옌성엘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건물은 지어졌는데 책걸상과 칠판이 없었습니다. 그곳 관계자들은 책걸상이 없으면 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하면 되고 칠판이 없으면 벽에 검은 페인트를 칠하고 칠판으로 쓰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돌아와 화가 이철수와 의논하여 책걸상을 마련하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유열, 안치환, 범능 스님 이런 분들이 무료로 공연을 해 주었고 많은 분들이 표를 사주어 3000만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그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2007년에 호아빈2초등학교를 준공했습니다. 호아빈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한국군이 주둔했던 지역인데 전쟁기간에 한국군에 의해 죽은 양민이 1800명 정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준공식 날 한국에서 간 기자가 교장에게 마이크를 대고 물었습니다. “교실과 운동장 포장과 조경까지 다 마쳤는데 어디가 가장 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한참을 머뭇거리던 교장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진 게 가장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돈이 많아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선배들은 전쟁을 했지만 후배들이 해원, 상생하는 일을 한다면 좋은 일 아닌가 싶었습니다. 전쟁을 하는 사람들에겐 전쟁의 논리가 있습니다.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겐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문학이나 문화 예술은 싸움을 말리는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효의 화쟁 사상도 말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데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푸옌성의 중심도시인 뚜이호아 한복판을 흐르는 강이 쏭바입니다. 쏭이 베트남어로 강이니까 바강이라는 말입니다.(우리에게는 박영한의 소설 <머나먼 쏭바강>으로 잘 알려진 강입니다.) 그 강가에 앉아서 베트남은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건기인데도 강물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소 여러 마리를
강으로 끌고 들어가 몸을 씻기고 있었다
가슴까지 차는 물속에서 짙은 고동색 몸을 씻으며
물을 치받는 소 등 위로 알몸의 아이가
올라탔다 미끄러지며 깔깔대는 소리가
강 햇살과 함께 반짝이며 떠내려 왔다
수십 년 전쟁을 통해 얻은 작은 평화의 한때를
사람과 짐승이 함께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은 완성이 아니고
승리는 거대한 난관의 또 다른 시작일 뿐임을
강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투쟁이든 값진 것은 과정일 뿐
목숨을 걸었던 전사들은 한산하게 흔들리는
즈아나무 밑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담뱃불을 붙일 뿐
물에서 나온 소들끼리 뿔싸움을 하며
장난치는 모습을 빙긋이 웃으며 바라볼 뿐
목장은 자본을 아는 이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값진 것은 전선에 있던 시절이었다고
피 흘리며 싸우던 날들이었다고
이제는 친구가 된 강물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졸시 <쏭바> 전문
“해방은 완성이 아니고 / 승리는 거대한 난관의 또 다른 시작일 뿐임을” 아는 이들은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하여 돌파구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 와중에 목숨을 걸었던 전사들은 천천히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본의 생리를 아는 이들이 앞에 나서는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 전사들도 인생의 가장 값진 시간은 전선에 있던 시절,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섰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쨌든 이젠 전쟁을 기억하는 일보다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해마다 그 학교에 컴퓨터 등 교육기자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어린 학생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도우려고 합니다. 동네이름에서 비롯된 그 학교 이름이 우연히도 호아빈, 즉 평화학교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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