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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6.10 20:12 수정 : 2011.06.10 20:12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종족간 학살·원전 방사능 오염 등
이 정도 세상밖에 못만들었지만…”
자연의 회복력·인간의 정신·열정
그것을 믿고 희망을 만들어갑시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49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요?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을 하루의 시간에 견주어 본다면 우리는 지금 몇 시쯤을 지나가고 있는 걸까요? 저는 세 시를 넘어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열두 시 전후한 시간은 치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쳐 있었으며, 의기소침한 채 오후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저무는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기 전 찬란한 노을이 하늘을 가득 물들이는 황홀한 시간이 한번쯤 오리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계절이 후천개벽이 열리는 가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 일찍 찾아와 북극의 빙하가 녹고 하늘 곳곳이 벌레 먹은 자국처럼 뚫려 바닷가 마을이 물에 잠기고, 대부분의 대지와 숲이 사막으로 변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리석은 인간들이 오만함을 버리지 못해 원전이 터지거나 핵무기를 쏘아 올려 곳곳에서 절멸의 징후가 나타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깃들어 살고 있는 이 숲과 자연이 한순간에 폐허로 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인 구달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숲들이 사라지고, 토지는 침식되고, 수면은 말라가고,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굶주림, 질병, 가난, 무지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 탐욕, 질시, 복수, 타락이 있다. 세계의 대도시에는 범죄, 약물, 갱, 폭력이 있고, 수천의 집 없는 사람들은 살림을 유모차, 쇼핑 카트, 또는 등에 지고 다니면서 문 앞이나 창틀에서 잠을 자고, 살아가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종족 갈등, 학살이 일어나고, 평화협정들이 깨어지고 있다. 수백만 명이 총에 의해, 칼에 의해, 지뢰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고 있다. 또 다른 수백만 명은 피난민 신세가 되었다. (…) 체르노빌 사고의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벨라루스는 히로시마의 아흔 배에 달하는 방사선 피해를 입었고, 전체 토지의 1%만이 오염되지 않은 채로 남을 수 있었다. (…)

세계는 ‘일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한동안 흐느끼는 사이에’ 종말을 맞을 것이다. 지구라는 우주선의 생명체들이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동안 흐느끼는 사이에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제인 구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가 삶의 방식을 바꿀 때에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변화는 당신과 내가 가져오는 것이며 변화의 책임 또한 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희망의 이유>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지혜,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에게서 발견하는 에너지와 열정, 불굴의 인간 정신 네 가지가 끝까지 희망을 갖게 하는 이유라고 합니다.

인간이 겨우 이 정도의 세상밖에 만들어 놓지 못했지만, 그래도 희망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 불굴의 인간 정신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자연도 우리를 사랑할 것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은, 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우리 인류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정당한 이유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함께 슬퍼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서 있는 시간이 그런 오후임을 생각하며 이런 시를 썼습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졸시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전문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제인 구달은 말했지만 그래도 여유를 갖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해월 선생의 말씀을 믿고 따를 것이며, 존 러스킨이 말한 대로 “살아 있는 생물은 어떤 것도 쓸데없이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지 않겠으며, 하찮은 생명까지도 소중히 지키고 가꾸며 지상의 자연스런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 것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에 존중받는 세상, 강자의 논리, 힘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의 원리, 상생의 원리로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남은 시간을 쏟고 싶습니다.

이해관계와 이익에 민감하기보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글 쓰고 문학이야기를 하는 시간 그리고 지적인 만남에서 기쁨을 찾고 행복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남은 시간 동안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고자 합니다.

몇 해 전 어느 음악회에서 가수의 노래가 잠시 멈춘 사이 간주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습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빨아들이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왔습니다. 저는 제 시가 저렇게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제 시, 제 삶이 남의 가슴의 방파제를 뒤흔들어 놓으며 파도처럼 부서지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시를 쓰고 있고 시인이라고 얼굴을 내밀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았습니다.

로댕은 “예술은 감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제 시가 남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데도 저는 시인입니까? 단 몇 분도 숨을 멈추게 하는 선율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끄러지는 언어를 붙들고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문학 아닌 것을 향해 빠져드는 삶,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기웃거리는 삶을 때려엎고 싶었습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거덜나고 싶었습니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라는 시는 그런 생각을 옮겨 적은 것이었습니다.

치열하되 거칠지 않은 시, 진지하되 너무 엄숙하지 않은 시, 아름답되 허약하지 않은 시, 진정성이 살아 있으되 너무 거창하거나 훌륭한 말을 늘어놓지 않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시가 써지는 게 아니라서 오늘도 한 편의 시 앞에서 두렵고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어둠이 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 동안 제가 할 일은 그런 시를 쓰겠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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