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1.13 13:40 수정 : 2011.01.15 09:31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매거진 esc] 닥터 소의 심심 클리닉

Q 제 남자친구는 술에 취하면 제게 전화를 걸어 잠들 때까지 수다를 떱니다. 자기 전 통화하는 습관 때문에 버릇처럼 거는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닌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평소 마음에 두었던 불만들도 얘기합니다. 처음엔 그 말을 다 받아줬는데 다음날 물어보면 하나도 기억을 못하더군요. 전 그 술김에 하는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취중진담이라 생각돼 서운하고 속상해요. 그런데 오해를 풀거나 사과를 들어야겠다 싶어 다음날 전화하면 그는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느냐며 펄쩍 뜁니다. 왜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평소 잘 다투지도 않고, 술기운에 얘기할 만큼 소심한 성격도 아닌데 왜 술에 취하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을까요. 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님 정말 저와 헤어지고 싶을 만큼 숨은 불만이 많은 걸까요? 기억도 못한다는 취중에 하는 말을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지 몰라 답답합니다.

A 통화 녹음해서 한번 들려주세요

먼저 이 고민 사연은 남자친구분이 보내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기억도 나지 않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자신이 불안하지 않으신지요.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말이죠. 혹시 걱정이 안 되신다면 술에 대한 태도 문제를 생각해봐야 될 겁니다. 비단 이 남자친구뿐 아니라 우리 사회는 왠지 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너그러운 편이지요. 솔직히 덕분에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있었습니다만… ㅎㅎ.

하지만 술 먹고 실수한 입장에선 술김이니 다행이라고 쳐도 간혹 그 결과와 피해는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이 문제지요. 때로는 심각한 범죄가 되기도 하니 ‘기억 안 나니 봐 달라’는 데도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블랙아웃’이라고 하는 ‘필름 끊김’ 현상을 많은 분들이 경험하실 텐데요. 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단기간의 진행성 기억장애가 오는 걸 말하는 것이고 ‘전날 술 먹고 한 나쁜 짓이 기억 안 나요’의 주범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대부분 블랙아웃을 경험하고도 다음날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너도 끊기고 나도 끊겼으니 ‘어제 너무 달렸어’ 하면서 서로 봐주기 일쑤지요. 하지만 이는 명백히 술의 독성상태로 인한 신체 특히 뇌의 이상 상태라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결국 반복되면 그만큼 뇌의 건강에 해롭고요. 사연의 남자친구분은 바로 이 블랙아웃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전화를 걸어 다음날 기억에 나지 않는 말을 뱉으신다는 거죠. 아직 대형사고 같진 않으나 내용에 따라선 연인에게 상처주고 그로 인해 사랑을 놓칠 수도 있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벌써 여자친구분이 혹시 ‘취중진담 아냐?’라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친구분, 긴장되시죠?

그럼 남자친구분이 술김에 진심을 얘기하는 걸로 생각해도 좋을까요? 블랙아웃에서 하는 얘기는 ‘취중진담’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블랙아웃 상태가 되면 뇌의 정상적인 통제기능이 억제되기 때문에 이성과 도덕이 조절하던 생각과 행동들도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그러니 이때 하는 말은 하고자 하는 진심이라기보다는 내가 느끼는 불안과 심지어 무의식까지 뒤섞인 ‘못 들어주겠는 말’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취중진담이라고 하려면 적당한 취기에서, 조금은 의식적으로 용기를 내어, 그동안 지나치거나 잘못되게 작용하던 통제의 힘을 잠깐 벗어나, 진심을 드러내는 것일 테죠. 그러나 블랙아웃 상태에서는 그 정도의 수준을 지나쳐서 필요한 정상적 통제까지 술의 독성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때 나온 말의 내용이 상대에게 평소 하고 싶은 것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블랙아웃 때 말하는 내용들이 다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평소의 불안, 고민, 자신의 심리적 갈등, 무의식적인 요소 등을 담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걸 맘에 걸려 한다면 상대의 흐르는 생각들이나 꿈, 심지어 무의식까지 검열하고 기분 나빠하는 지나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자친구분의 경우에도 블랙아웃 상태에서 상대에게 들었던 섭섭함, 화, 불만, 자신에 대한 실망, 만남에 대한 불안, 오다가다 들었던 딴마음 등을 마구잡이로 말했을 듯한데요. 평상시라면 이런 생각들은 상대에 대한 애정, 자신의 경험, 판단력, 이성 등으로 대부분 걸러져서 자신의 진심이 아님을 쉽게 깨달았을 겁니다. 그러니 우선 여자친구분! 남자친구분이 블랙아웃 상태에서 하는 말은 무시하심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남자친구분입니다.


닥터 소의 심심클리닉
서두에 얘기했듯이 이 문제는 남자친구분이 스스로 경각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여자친구분이 그를 돕고 싶다면 상대가 술에 취해서 기억도 못하는 얘기를 할 기회를 주지 마세요. 블랙아웃 상태에서 하고 있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남자친구분이 스스로 노력해야 된다고 분명히 요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방법적으로는 긴 술자리 끝에 걸려온 전화 통화는 하지 않기로 서로 정할 필요도 있겠죠. 그래도 취한 남자친구분이 버릇처럼 또 전화를 해서 상처되는 얘기를 할 수도 있으니, 그도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경각심을 살려줄 여러 수단을 강구해 볼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그 통화 내용을 녹음해서 들려주시는 등의 방법처럼요. 무엇보다 그가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러지 않으려는 동기를 갖게 하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연의 남자친구분, 사랑하신다면 그 정도는 자신과 여자친구분을 위해 하셔야 합니다.

정신과 전문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닥터 소의 심심클리닉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