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의 마음으로 결정과정 도와준다면…
|
매거진 esc] 닥터 소의 심심 클리닉
의존적이면서도 제멋대로인 형이 버겁습니다
올해 고3이 되는 제게는 10살 많은 형이 있습니다. 형은 고교 자퇴 뒤 중국집 배달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희귀병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10년 세월을 집에서 티브이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처지를 비관하면 술 마시고 집기를 부수거나 아버지를 때리는 등 행패를 부렸죠. 몇 년 전부터 난치병 치료를 받으면서 몸은 다 나았기에 그런 일은 줄었습니다. 본인도 그런 생활을 더는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수능시험을 치렀고 전문대 진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본인의 진학 문제를 학생인 저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제가 학생이니 더 잘 알겠지만 기본 정보조차 ‘잘 모르겠다’며 저에게 알아보기를 떠넘깁니다. 돌이켜보면 형은 모든 문제에 그런 식이었습니다. 아무리 이해해주려고 해도 형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A 정말 많이 답답하시겠습니다. 형님이 주시는 부담은 아마도 그 자리에 있다면 누구나 힘들 만한 일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가자면 먼저 형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지 10년의 기간 동안, 형님은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까요? 안타깝게도 자퇴 이후 뭐 하나 잘 풀리는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오토바이 사고로 병까지 얻었으니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화도 많았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기 불행이 가족이나 사회의 탓으로 느껴져 분노감에 사로잡혀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네요. 게다가 기분 조절의 문제와 알코올 문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동 문제까지. 지켜보는 사람들이야 ‘왜 저러고 사나’ 한심해하셨겠지만, 정작 그 속에서 지내야 했던 방황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헤쳐나갈 희망과 노력은 더 아득해졌겠지요.
다행히 난치병이 치료되면서 회복의 기미와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행운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형님이 지금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이는 10살이나 많지만 경험과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고, 이미 자퇴를 결정할 때 쓰던 회피라는 방법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딪쳐 배우기’ 같은 면은 발전보다 오히려 퇴보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형님 또한 자기 자신을 그다지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요. 그래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란 게 참…. 아직도 옛날 그 방식대로 동생에게 떠넘기고 무책임하게 굴고 있으니 형님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두번째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주인공을 포함한 가족의 마음입니다. 잘 살아보겠다며 가족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청하니 도와는 줘야겠는데 왜 이렇게 부담스럽고 싫을까요? 우선 그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 형님이 그동안 10년간 가족에게 고통 주던 방식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도와달라는 정도가 의지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존을 하려 드는 인상을 주니 동생 처지에선 부담스러울밖에요. 무엇보다도 어려운 건 주인공을 포함한 가족들에게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 형님에게 쌓인 화와 불신이 상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연을 읽어보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 하나가 빠져 있긴 한데요. 그건 바로 ‘용서’입니다. 형님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 적이 있었을까요? 주인공과 가족들은 이 형님을 진심으로 용서하신 걸까요? 이는 양쪽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화와 불신 때문에 아직 형에게 마음을 열기 힘드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형님이 문제점을 다 극복하고 난 다음에야 가족이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탈 많고 미숙한 형님에겐 영영 기회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잘해보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었다는 변화에서 적어도 지난날에 대한 후회만큼은 진심이 아니겠나라고 바라봐주어야 그 귀한 불씨가 잘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형님의 자긍심, 희망, 보람 등등의 밝은 면이 살아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용기도 자라서 진심으로 가족에게 잘못을 구하거나 어린 동생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일도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니 용서하는 마음으로, 아니면 적어도 용서할 준비를 하고 도움을 줘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
닥터 소의 심심클리닉
|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마냥 도움을 주다간 형님이 그동안 보여왔던 잘못된 방식을 답습하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정을 떠넘기고 책임을 회피하고 결과에 대해 남 탓을 하다 보면, 모처럼 살린 희망의 불씨는 어느새 사그라지고 말 테니 걱정이죠. 화는 나시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하실 일은,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정보와 방법을 일러주는 일일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골라주는 것이 아니라 입시 자료와 각종 정보들을 같이 살펴봐주고 원하는 학과와 하고자 하는 일 등을 생각해볼 수 있게 대화도 많이 해야겠죠. 중요한 것은 과정을 좀더 도와줌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몫은 형님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늦었지만 배울 수 있도록 하고, 결과가 나쁘다고 실패하거나 비난받는 게 아니란 걸 느끼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무엇보다 결과보다도 변화를 시작한 용기와 실천하려는 노력에 더 박수를 쳐주는 가족의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참 힘든 일을 하시라고 쓰고 있군요. 그래서 이 모든 일보다 먼저, 힘든 시기를 참고 기다려줬을 뿐 아니라, 이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고민까지 하고 계시는 동생분께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기운 내세요!
정신과 전문의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