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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17 11:27 수정 : 2011.03.17 11:27

김경주의 ‘후달리는 불량배들’

[매거진 esc] 김경주의 ‘후달리는 불량배들’

핑은 얼마 전 그토록 꿈꾸어오던 뮤지컬 무대에 섰다. 무대를 꿈꾼 지 10여년 만이었다. 핑은 열여덟살이 되자 숨겨진 끼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몰래 바나나우유를 많이 먹은 탓인지, 또래들보다 목 하나는 더 자랐고, 거울 앞에서 교복치마를 허벅지까지 올린 채 윙크를 날리는 모습은 자신이 보아도 남달라 보였다. 모델에 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핑은 어느 날 자취하는 친구 방에서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다큐멘터리에 등장해 늘씬한 목선으로 열매를 따 먹는 기린의 행렬들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날 기린이라고 불러줘. 내 예명이니까.” 밥숟가락을 쪽쪽 빨던 주근깨 친구가 말했다. “맹수들 늘 조심해라.”

핑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얼마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자퇴서를 학교에 제출하던 날, 담임은 교문까지 바래다주며 한마디를 던졌다. “선생님들이 네 수학성적 때문에 종아리를 때릴 때마다 다리에 상처가 생기느니 차라리 뺨을 맞겠다던 네 앙다문 다짐을 꼭 지켜가거라.” 수차례 오디션을 보고 나서야 핑은 세상이 녹록지 않고 모델을 하기엔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변명 같은 거. 핑은 술 없이 못 사는 편부에게 툭하면 얻어맞았고, 세상은 툭하면 그녀의 다리를 먼저 만져보고 배역을 결정하겠다는 비즈니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핑은 기린처럼 잘 도망 다녔다. 물론 며칠씩 먹이가 없어 덤불 속에 숨어 뜬눈으로 보낸 적도 많았다. 어느 날 새벽 월세방 공용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있는데, 늙은 집주인 맹수가 밖에서 침을 흘린 채 문을 덜컹거릴 때는 문고리를 잡고 운 적도 있었다.

핑은 다시 카레이서 모델에 도전했다. 학원비 대신, 거리의 폼 나는 차를 포즈 연습 상대로 삼았다. 남의 차 범퍼에 올라타 있는 핑을 보면 차 주인들은 어이없어하거나 차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핑은 심야의 폐차장을 찾았다.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두 병으로 폐차장 경비와 합의 보고 갈무리했다. 욕망이 사라진 폐기된 차들에 올라타 핑은 그들을 밤새도록 문질러주었다. 카레이서 모델 오디션을 본 몇달 뒤, 핑은 겨울의 어느 해변에 누워 위풍당당 수영복을 입은 채 7월의 달력모델 주인공이 돼 있었다. 핑은 티팬티와 가터벨트 스타킹을 번갈아 착용하며 1월부터 12월까지 달력 속에 등장했다. 핑은 삼류 사진작가와 야한 달력 제작자 사장과 함께 전국 곳곳의 은밀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촬영했다. 밤마다 여관방의 리허설을 감당해야 했던 악몽에 대해서 핑은 달력 속의 묘한 비웃음으로 대신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퇴폐 이발소 벽에 걸려 있는 핑은 웃음 속에 이를 악무는 자신만의 표정을 개발했다. 야생을 뛰어다니던 기린은 늘씬한 다리가 아니라 그 기묘한 표정의 포트폴리오로 뮤지컬 오디션에 합격했다. 대본에 적힌 그녀의 배역은 가터벨트를 착용한 채 슬프게 노래 부르며 웃고 있는 ‘희생당한 양 한 마리’였다.

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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