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3.31 10:53
수정 : 2011.03.3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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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후, 달리는 불량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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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경주의 ‘후달리는 불량배들’
얼마 전 절도로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헐은 최근 우체국 집배원이 되어 열심히 골목길을 외우는 중이다. 번지수를 기억해두기 위한 고충이 심하다. 이러다가 머리가 나빠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런 건 직관에 의존했던 과거 버릇(?)을 버리느라 고생중이지만 이번만큼은 열심이다. 아직 비정규직 상시위탁집배원에 불과하지만 청소년 시절 폭주족 경험을 살려 오토바이로 궂은 길, 구린 지역 안 가리고 대무사역에 해당하는 우체국 택배 알바를 몇 개월 성실히 잘 해냈고, 몇 년 잘 버티면 위풍당당 국민통신의 혈액에 해당하는 중추 기간사업인 우체국 집배원이 될 수 있다는 꿈으로 부풀어 있다. 물론 우정사업본부에서 자신을 고용할 때 과거내력(전과)이 담긴 수형인명부를 떠들어 보지 않는다는 기적이 일어나야겠지만. 징역 3년 이하는 5년간의 기록 보관만 한다는 법을 믿어본다.
헐은 일과 후 다음날 배달할 업무량을 살필 때면, 자신이 지금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여 착오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말하는 평균치 삶의 근삿값에 다가가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헐은 비장한 마음으로 그날의 우편물들을 받아 든다. 직업상(?) 날씨가 꾸질거리는 날을 늘 선택해야 했던 과거사를 비추어 볼 때 요즘은 가능한 한 맑은 기상에 휘파람 불면서 일하고 싶어하는 자신이 좀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복역 중이던 안에선 바깥소식이 너무 궁금했고, 복역 후 밖에선 소식을 나르는 일이 이토록 살맛난다. 과거엔 ‘이곳을 털까? 저곳을 털까?’가 고민이었다면 요즘엔 ‘이곳을 오늘 배달할까? 내일 갈까?’로 고민이다. 그러니까 헐의 일상은 이제 정확한 물건을 신속하게 가지고 나와야 한다에서 한 집으로 정확히 물건을 배달해야 한다로 직업 강령이 바뀌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뀐 게 있다면 친근감 있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몇 생겼다는 것 정도다.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요구르트를 내주는 홀몸노인을 만났을 때는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쑥스러워서 목격자를 만나 대질당했을 때처럼, 얼굴이 경직되기도 했다. 몇 달 뒤 방에 공벌레처럼 누워 있는 그 노인의 주검을 발견했을 때 헐은 그 집 마당 고추장 장독단지 옆에서 쭈그려 앉아 오열했다. 달동네 언덕길까지 올라오는 자신이 유일한 소식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이래서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은 거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식이 없었다. 그것이 세상이었는지, 자신이 품은 질문이었는지 헐은 아직도 잘 모른다. 헐은 복역 뒤 처음으로 다시 남의 집 담을 넘어 그 노파를 발견했다. 집배원이 되면 사람들의 말 못할 곡진한 사연이 담긴 편지나 엽서들을 배달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젠 공과금 고지서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몇 년 뒤 있을 10급 기능공무원 채용담당 ‘우정사업본부’의 ‘우정’이라는 단어에 신뢰가 간다. 지난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우린 ‘소식’으로 꽁꽁 맺어진 우정 아닌가.
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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