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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1.04 13:13 수정 : 2010.11.25 15:12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25년 전 10월에 그를 만났다. 철원의 비포장 군사도로를 달리는 군용트럭 안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난 신병 교육을 마치고 막 이등병 계급장을 단 풋내기 사병이었고 그는 분대장 교육을 받고 부대로 복귀하는 하사였다. 딱 보기에도 세상 모든 고민 다 끌어안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우수에 젖은 눈동자를 가진 그런 과의 사람들에게 끌렸다. 트럭 안에는 분대장 하사들 대여섯에 이등병 여남은 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단연 그가 빛났다. 운명이었는지 그와 같은 중대로 배치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데모하다가 잡혀 끌려간 운동권 학생에게 군생활은 많이 괴로웠고 철원의 추운 날씨도 견디기 힘들었다. 난 고참들 몰래 포창고에 짱박혀 있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짧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때마다 철원을 떠나 최루탄 냄새 가득했던 캠퍼스로 날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포창고의 문을 열고 그가 들어왔다. 어쩌나! 내가 경례를 붙이기도 전에 그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울고 있는 그를 보고 있었지만 아직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은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의 비밀을 훔쳐보는 것 같아 미안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의 울음이 잦아들 때쯤 밖에서 나를 찾는 고참의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관등성명을 외치고 뛰어나가야 했지만 그에게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나를 발견했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누군가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군생활을 하기엔 너무 유약한 사람이었다. 분단된 조국은 그런 사람도 예외 없이 징집했고 설상가상으로 분대장 교육까지 받게 했다. 마초들의 집합소인 군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한 그날부터 우리는 남몰래 포창고에서 만나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가끔씩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은 그는 작업을 나갔다 오는 길에 들꽃을 한아름 꺾어 와서 내게 직접 주지는 못하고 우리 내무반 화병에 꽂아 놓는 걸로 애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사람, 이성애자였다. 군에 오기 전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고 가끔 면회를 와서 내 속을 긁어 놓았다. 외박증을 받아 면회를 나가는 그를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해피엔딩을 꿈꿨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은 빨리 흘렀고 그가 전역을 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띄엄띄엄 오던 편지가 끊겼을 때 현실을 깨달아야 했는데, 아직 어렸던 난 제대를 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매섭게 겨울바람이 불던 밤에 “널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매몰찬 답을 듣고 나서도 그에게 몇 번을 더 매달리다가 눈물바람을 하면서 정리했다.

이성애자인 그가 왜 남자인 나를 “사랑한다” 했다가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로 바꾸었는지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내가 사랑했으니 그걸로 됐다. 합의에 의한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가 위헌 소지가 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접하면서 문득 그가 떠올랐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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