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11.18 11:04
수정 : 2010.11.2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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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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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티나’라는 이반(異般·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 이름을 가진 후배가 있었다. 티나는 요리를 잘하는 친구였다. 서울 충정로 근처에 작은 스파게티집을 운영하던 녀석에게 게이 친구들은 ‘스파게티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걸 줄여서 티나라고 불렀다. 녀석은 티나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익숙해졌고 나중엔 정겹다고 좋아했다.
티나는 경북 영주가 고향이었는데, 영주에서도 시내가 아니라 시골 쪽이어서 우리는 그를 시골 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짐작하겠지만 그는 고향에서 게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시골 노인들은 게이라는 단어도 몰랐을 것이고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갠지도 다 아는 그런 마을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건 그 공동체를 떠나야 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 시골 게이 티나가 동성애자라는 걸 드러내고 살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스무살 초반에 서울에 올라온 티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이태원과 종로의 골목들을 뒤져 게이바를 알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게이들은 하룻밤 상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친구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게이바를 드나든 지 10년이 넘은 어느 날 종로의 포장마차에서 게이인권운동을 하는 친구를 만나면서 티나의 운명은 바뀌었다.
노래방에 가면 마이크를 놓지 않을 정도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던 녀석은 게이들로만 구성된 합창단 ‘지-보이스’에 가입을 하게 되고 그 합창단 공연에 함께하면서 자신이 게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드러내게 되었다.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는 서울 한복판의 큰 무대에 서기도 했고 대구 공연에는 어릴 때 짝사랑하던 친구 부부를 초대하기도 했다. 더이상 골방에 틀어박혀 눈물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되었고 동성애자로 사는 것에 대한 자책도 사라져갔다. 친구들도 많아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그렇게 지-보이스 단원으로 활동했던 기간을 녀석은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불렀다. 그렇게 황금기를 구가하던 티나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황금기는 고작 2년이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제야 가족들은 티나와의 사이에 놓여 있던 두꺼운 벽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확 달라진 이유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티나의 1주기 추도식이 있어 그가 잠들어 있는 납골당에 갔다. 가족들과 게이 친구들 여럿이 모였고 영정 속의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가족들은 더 일찍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짧게 살다 간 인생, 한번뿐인 인생, 가족들과 더 허물없이 지내다 갔으면 하는 마음에다 티나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몇 년을 더 살다 갔다면 공연에 가족들도 초대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나 편하자고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싶어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주저하던 녀석이었는데, 가족들 마음은 그랬다. 다른 세상에서라도 그가 그걸 알면 좋겠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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