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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02 14:29 수정 : 2010.12.02 14:29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1983년, 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은 대학 신입생이었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무대에 올라 연기도 하고 싶었고 엠티도 가고 싶었고 캠퍼스 잔디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우고 싶었다. 풋내기의 파란 꿈이 사라진 건 다 그 선배 X를 만난 때문이다.

나는 학교 밖에 있던 모임을 통해 사회과학 공부를 하던, 그렇지만 투쟁의 신심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는데 그런 나를 포기해서 그랬는지 나를 담당했던 다른 학교 선배가 우리 학교 선배인 X에게 나를 인계해 주었다. X는 나보다 두 학번이 위였다. 적당히 큰 키에 창백한 얼굴, 뿔테 안경까지 ‘모범생과’의 전형이랄 수 있는 그에게 내가 반한 건 촌스러운 안경 너머에 숨겨져 있던 예쁜 눈을 본 뒤였다. 그는 늘 안경으로 예쁜 눈을 가리고 다녔다. 패션 감각이라곤 없는 사람, 청바지에 ‘야전잠바’ 따위의 차림새였다. 화려한 색깔의 셔츠나 때때로 쓰던 모자들, 큰맘 먹고 지른 나이키 신발 때문에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이 많았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들은 대부분 ‘민중’ ‘혁명’ ‘해방’ 같은 섹시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말은 또 어찌나 어렵게 하는지 그의 말 중 절반은 못 알아듣기 일쑤여서 재차 물어야 했다. 하지만 가끔씩 안경을 벗을 때 보이는 예쁜 눈과 안경을 잡고 있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자꾸만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게 그에게 반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시위, 농성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내가 있었다. 민중, 혁명, 해방마저도 섹시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자기를 따라오라며 나를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왜?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고 가슴은 쿵쾅쿵쾅 터질 것만 같았다. 진정시키며 그를 따랐다. 아무도 없는 집. 게다가 보여줄 게 있다며 은밀한 곳에 숨겨둔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는 그를 보며 물음표는 사라졌다. “형, 샤워하고 올게요.” X는 뜨악하게 나를 바라보았지만 난 샤워도 하지 않고 그를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고 식구들이 금방 올지도 모른다며 재촉하는 그의 말에 다소곳이 옆에 앉았다. 몸을 돌리면 바로 키스를 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자리에. 그러나 그러나… 잔뜩 긴장하고 바라본 티브이 모니터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은밀한 모임에 배속되어 심도 깊은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운동권 학생이 되어 갔다. 그를 향해 품었던 연정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낭만이 아니라 혁명을 꿈꾸는 내게 그는 더 이상 예쁜 눈을 가진 남자가 아니었고 적들에 맞서 함께 싸우는 동지였다.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던 몇년 전 아스팔트 위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날렵한 안경에 중년 남자의 멋이 있었다. 안경을 잠깐 벗어보라고 꼬드겼지만 그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번주에 민주동문회 송년회가 있다는 메일을 받았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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